'노년의 믿을 구석' 국민연금, "나라에 부담" 편견 깨기 16년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60' ㊼]

2025-11-05

대한민국 '트리거 60' ㊼ 국민연금제 도입

적립금 1400조원(국내총생산의 50% 수준), 가입자 수 2198만 명(10월 말 기준). 국민 노후생활 보장의 핵심 축인 국민연금의 현재 모습이다. 1988년 도입된 국민연금은 일본 공적연금(2200조원), 노르웨이 국부펀드(2000조원)에 이어 전 세계의 연기금과 국부펀드 중 3위 규모다. 그동안 국민연금은 늘어나는 노령층의 소득안전망 역할을 해 왔다. 특히 1차 베이비 붐 세대(55~63년생) 약 700만 명의 주요 노후소득원이 되고 있다. 국민연금은 국내 자본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투자 비중은 192조원(8월 말 기준)으로 국내 상장사 평균 지분율이 6%에 이를 정도로 ‘큰손’이다. 국민연금은 기업 경영 과정에서 의사 결정에 개입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국민연금제도는 도입 논의부터 시행까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연금제도를 도입하면 저축 제고뿐 아니라 국가 재정을 위한 투자재원 조달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1972년 11월 30일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과 경제 부처 장관들이 모인 가운데 한국개발연구원(KDI) 김만제 원장이 연금제도 도입 필요성을 보고했다. 박정희는 10월유신 직후 “유신에 대한 평가는 수출 100억 달러 달성에 달려 있다”며 “모든 정책 초점을 이에 맞추어 집중하라”고 강력히 지시했다. 특히 “중화학공업의 재원 마련을 위해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라”고 주문했다.

도시로의 인구 집중, 핵가족화로 인한 인구구조의 변화가 빨라지면서 전통적인 가족 부양체계로는 늘어나는 노인 인구의 부양이 점점 어려워지던 시절이었다. 사회보장 연금제도의 도입이 필요했다. 하지만 당시 국내 정치권에선 유럽 등 서구권에서 시행하는 복지제도가 경제적으로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는 ‘소비성 정책’이라며 부정적 인식이 많았다. 경제개발이 시급한 한국적 상황에서 도입은 시기상조라는 것이었다. 김 원장은 오히려 “연금제도를 도입하면 수출 역량을 키우기 위한 투자 재원 마련이 용이하다”는 논리로 설득했다. 장시간 토론 끝에 박정희는 연금제도 도입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라고 했다.

86년 유럽 순방 직후 귀국길에 결정

1년 후인 73년 12월 ‘국민복지연금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하지만 중동전쟁으로 제1차 석유파동이 터지고, 74년 1월 긴급조치가 발동돼 연금제도 시행은 무기한 연기됐다. 2015년 국민연금공단이 펴낸 『실록, 국민의 연금』에 따르면 논의가 다시 시작된 것은 전두환 정부 때다.

81년 1월 새해 첫 국무회의, KDI 김만제 원장은 국민연금 도입을 포함한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기본구상’ 보고서를 들고 다시 청와대에 들어갔다. 보고를 받은 전두환은 특별한 논평을 하지 않았다. 내심 대통령의 반응을 기대한 김 원장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KDI 측은 한두 차례 국민연금 관련 보고서를 만들어 청와대에 올렸지만 성과는 없었다. 84년 1월엔 KDI에 새로 부임한 안승철 원장이 신임 인사차 청와대를 방문해 국민연금을 다시 보고했다. 전두환은 “한국에서 이런 것 하면 경제가 망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한다. 2년 후인 86년 4월 21일 유럽 4개국 순방을 마친 전두환이 공군 1호기를 타고 막 귀국길에 올랐다.

비행기가 알프스 상공을 지날 무렵, 수행 중이던 김만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사공일 청와대 경제수석이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각하 듣기 싫은 얘기일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방문한 영국·독일 등이 부국인 이유는 은퇴자들이 노후에 빈곤을 걱정하지 않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 경제도 많이 성장했으니 국민연금제도를 통해 국민이 노후 빈곤을 걱정하지 않고 살게 해줘야 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 말 없이 얘기를 듣던 전두환이 입을 열었다.

“참 질긴 사람들이구먼. 내가 그렇게 안 된다고 했는데 말이지. 좋습니다. 도입을 검토해 보세요.”

대통령 승인이 떨어지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8개월 후인 12월 31일 국회에서 ‘국민연금법’이 통과됐다. 시행은 88년 1월부터였다. 초기엔 1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가 가입 대상이었다. 전 국민 연금시대는 99년부터다. 국민연금 도입 37년이 지났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다. 십수 년째 논란이 되는 기금 고갈 문제, 세대 간 형평성 등 해묵은 과제들이다. 고성장 시대인 박정희 정부 때 설계한 골격을 10년 이상 지났는데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한 채 시행한 데서 비롯됐다.

처음에는 ‘덜 내고 더 많이 받는’ 식이었다. 88년 당시 소득대체율(받는 돈)은 70%, 보험료율(내는 돈)은 3%에 불과했다. 이후 5년마다 3%포인트씩 올라 98년 9%가 되도록 했다. 가입자가 낸 총액과 이자를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게 돼 있었다. 가입자 입장에서 보험료율 인상은 인기 없는 정책일 수밖에 없었다. 정부나 정치권은 오랫동안 보험료율 인상에 소극적이었다.

90년대 중·후반부터 저성장·저출산·평균 수명 증가 문제가 대두하면서 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국민연금은 대대적인 수술이 불가피했다. 98년과 2007년 연금개혁이 이뤄졌다. 김대중 정부는 소득대체율을 70%에서 60%로 낮추고, 연금수급 연령을 60세에서 65세로 늦췄다. 이후에도 연금 재정 불안 이슈는 끊이질 않았다. 노무현 정부는 보험료율은 그대로(9%) 유지하되 소득대체율은 매년 0.5%포인트씩 낮춰 2028년까지 40%로 하는 단계적 하향을 결정했다. 두 번의 개혁에도 기금 고갈에 대한 우려, 소득대체율에 대한 불만 등이 겹치며 논란은 계속됐다. 정부는 가입자가 싫어하는 보험료율 인상은 1%포인트도 하지 않고 17년을 보냈다.

그러다 올 3월 20일 새로운 국민연금 개편안(2026년 1월 1일부터 시행)이 국회를 통과했다.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2033년까지 8년에 걸쳐 13%로 인상하고, 2028년 40%로 떨어질 예정이던 소득대체율을 2026년부터 43%로 올린다는 것이 골자다. 절충을 시도한 것이다. 소위 ‘조금 더 내고, 조금 더 받자’는 것이다.

연금개혁 밀어붙인 슈뢰더 총리

보험료율은 인상했지만 연금 고갈 등 근본적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비판은 여전하다. 특히 청년 세대와 미래 세대의 부담을 높였다는 측면에서 개혁이 아닌 개악이라는 지적도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 추정에 따르면 국민연금 미적립부채(2095년까지 낼 돈과 현재 적립금으로도 연금을 지급하기에 부족한 액수)는 1820조원에 달한다. 지급할 금액보다 적립금이 많이 부족하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선 자동조정장치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출산율, 평균수명, 경제성장률 변화에 따라 연금 급여액이 자동으로 조정되는 방식이다.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70%가 이 제도를 도입했다. 이번 연금 개혁 논의 과정에서도 뜨거운 쟁점 중 하나였지만 도입에는 실패했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달 국감 때 “(자동조정장치 도입에 대해)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스웨덴에 이어 2004년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해 연금개혁에 성공한 독일의 경우를 눈여겨봐야 한다. 당시 슈뢰더 총리가 이끌던 사민당 내각은 연금 재정 안정화를 위해 인구구조와 노동시장 상황을 반영해 연금제도를 개혁했다.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반대가 심했다. 경제전문가 위원회 의장으로서 연금개혁의 산파 역할을 한 베르트 뤼럽은 국민을 이렇게 설득했다.

“특정 세대가 다른 세대에 비해 월등하게 손해를 보는 것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개혁 목표를 정해야 한다. 그래야 세대 간 형평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가능해질 것이다.”

지속가능한 국민연금의 개혁은 세대 간 갈등을 줄여 국민통합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의미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전 국민 의료보험 실시’ 편입니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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