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유문화사가 자리한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아담한 건물. 직원 20명 규모의 크지 않은 출판사이지만, 1층에 들어서면 창립 80주년의 오랜 역사가 엿보인다. 숫자 '1945'가 또렷한 로고와 함께 유리 상자 안에 묵직한 책 한 권이 펼쳐져 있다. 해방 직후 종이를 비롯한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10년이 걸려 1957년 전 6권으로 완간한『우리말 큰사전』(한글학회 지음)의 1권이다.
"후대에 아무리 좋은 책을 기획해도, 『우리말 큰사전』 같은 책을 내기는 어렵겠죠." 정상준(57) 대표의 말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우리 말과 글을 되찾은 1945년, '출판은 곧 건국사업'이라고 여기며 민병도·윤석중·조풍연과 함께 12월 1일 을유문화사를 창립한 은석 정진숙(1912~2008) 선대 회장이다. 지난 9월 단독 대표에 취임한 그를 최근 만나 을유문화사의 지난날과 앞으로에 관해 물었다.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접했겠다. 출판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을유문화사가 다른 동네에서 1974년 종로구 수송동(서교동 이전은 2017년)으로 이사 오게 되는데, 그 자리가 제가 태어난 집이었다. 조부님과 대가족이 사는 집이었는데 문화예술계를 비롯해 사회 각계에서 활약하는 어른들이 많이 찾아오셨다. 돌이켜보면 제 성장기에 영향을 준 것 같다. 용돈 주시면 받고, 음료수도 나르고 하면서 어르신들이 무섭지 않았다. 집에 을유문화사 책은 물론 다른 출판사들 책들이 넘쳐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을 기회가 있었다. 어린 제게 버거운 책들도 많아 서문이나 표지만 보기도 했지만.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꽃들에게 희망을』을 굉장히 인상 깊게 읽은 기억이 난다."
그의 부친은 정진숙 회장의 5남 1녀 중 둘째. 1996년 암으로 별세한 부친은 의사이자, 당시 보기 드물게 "굉장히 친구처럼 편안한 아버지"였다고 한다.부친이나 삼촌들이 어려워했던 조부도 손주인 그는 편하게 대했고, 조부 역시 많은 손주 중에 내내 가까이 살았던 그를 귀여워했다고 한다.

어려서 "출판사에 입사할 생각은 안 해봤다"는 그는 2000년 조부의 부름을 받고 을유에 입사했다. 앞서 광고대행사와 영화투자사에서 일한 터라 "영화의 기획·배급·홍보 등이 출판과 많이 닮았다"고 돌이킨다. 당시 편집위원단을 꾸려 준비한 '을유세계문학전집'은 최근 146권째를 내며 이어지고 있다.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와 함께 그가 가장 애정을 지닌 시리즈다. 이후 그는 2008년 을유를 떠났다 2018년 다시 입사했다.
그사이 정 대표는 출판사 '그책'을 만들어 운영했다.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소프트한 책을 내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그책'에서 펴낸 영화 '아가씨' 각본집,『바이닐.앨범.커버.아트』 등은 "책과 음악과 영화를 트로이카라고 할 정도로 균일하게 좋아한다"는 그의 취향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홀로서기'의 시기를 "지금의 저에게 도움이 된 경험"이라고 말했다. 이후 을유에서 펴낸 '헤어질 결심' 각본집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80년을 돌아보며 계속되어야 할 것, 지향해야 할 것을 꼽는다면.
"작가와 독자를 잇는 가교 역할이다. 그런 부분에서 편집자들을 포함해 우리 직원들이 책은 물론이고 풍성한 문화예술을 직간접 체험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텍스트에만 함몰되어서는 더 입체적이고 중층적이고 풍성한 책을 탄생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인간적인 스침도 필요하다. 발품을 팔아가면서 작가와, 독자들과 소통하면서 일을 진행하는 순간 속에서 가끔 마법이 탄생하기도 하니까."
이어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며 "매출 지향적인 경영보다 가치 지향적인 출판 경영"을 강조했다."출판도 산업이지만 우리 직원들이 먹고 지낼 만큼의 월급이 꾸준히 나올 수 있다면"이라는 전제로, 직원들에게 '매출 극대화' 대신 "좋은 책을 잘 만들어서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선보이자"고 얘기하곤 한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인 것이 "고전의 재발견". "을유에서 냈던 책 중에서 새롭게 단장해 내는 작업, 미처 내지 못했던 고전 중에서 새롭게 내는 것까지 포함해서"다. 현재의 '을유세계문학'과 구성은 다르지만 을유가 일찌감치 '세계문학전집' '해외걸작선' 등을 펴냈던 것을 두고 하는 얘기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글자 풍경』(2019, 유지원 지음) 같은 책을 낸 배경도, 그는 을유의 첫 책『가정 글씨 체첩』(1946, 이각경 지음)에 담긴 "한글 회복의 정신"과 연결 짓는다. 모두 올해 만든 '을유문화사 대표 도서 80' 목록에 올라 있는 책들이다. 목록에는 새해 각각 원서 발간 50주년, 10주년을 맞는 스테디셀러『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지음),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유현준 지음)도 눈에 띈다.
-10년 뒤, 20년 뒤 을유가 기념할 것을 내다본다면.
"90주년은 애매하다. 100주년에 맞춰 첫째로, 다른 출판사들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해 '을유 100년사'를 준비하고 싶다. 둘째는 을유세계문학 300권 완간. 전체적 조화와 균형을 염두에 두고 소우주처럼 완결이 되길 바란다. '은석 정진숙 기념관'은 100주년 전에 만들고 싶다. 출판 편집자보다는 출판 운동가로 활동하신 분이다. 그 시대 어렵게 걸어왔던 길을 후대에게도 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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