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의 더 사람+
캘리그래퍼 김소영씨를 ‘더 사람+’에 추천합니다. 우연히 SNS에서 그가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을 보고 생동하는 기운을 느꼈습니다. 무대 위에서 붓과 하나 된 듯 춤을 추며 써 내려가는 글과 한 바퀴 휘돌며 일필휘지로 원을 그려내는 모습은 생동 그 자체였습니다. 일단 한번 퍼포먼스 영상을 찾아서 보십시오. 제가 왜 그를 추천하는지 알게 될 겁니다.

그렇게 알게 되어 찾아본 그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의정부에서 고교 졸업 후 경기도 파주의 LG디스플레이 공장에서 디스플레이 제품 품질 관리를 했던 그가 캘리그래퍼가 되고, 나아가 우리 글씨를 세계에 알리는 문화전도사가 된 과정 또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합니다.

제가 그의 삶과 캘리그래퍼 활동에서 큰 기운을 얻었듯 중앙일보 독자들 또한 그를 통해 생동하는 기운을 얻길 바랍니다.
중앙일보 독자이자 김소영의 팬 올림
추천을 받고 캘리그래퍼 김소영씨의 퍼포먼스 영상부터 찾아봤다.
영상은 한둘이 아니었다.
차고 넘치는 영상들,
하나같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퍼포먼스였다.
설치된 대형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단박에 마무리 원을 그려내는 그의 붓질,
가히 붓의 춤이었다.

특히 바람 드센 독도에서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독도의 날’.
그는 이날의 소회를
아래와 같이 밝혔다.
“거센 바람도
쏟아지는 비도
붓 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독도의 날’
이 땅의 숨결로, 바다의 숨으로….”
영상을 보고 난 후 바로 만남을 청했다.
이때가 8월.
하나 만남이 쉽진 않았다.
쉽사리 만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SNS를 통해 알 수 있었다.
8월엔 유럽,
9월엔 미국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정들 때문이었다.

그 일정들 속에서
잠깐 틈을 내어 만난 게 12월이었다.

말 그대로 틈이니
숨 돌릴 새 없이
삶의 순서대로 질문과 답을 이었다.
캘리그래퍼가 되기 전 공장에서 일하셨다고요?
고3이던 2008년 11월, 열아홉 살에 파주의 LG디스플레이에 입사했습니다. 한창 호황일 때 입사해 대우가 아주 좋았습니다.
당시 LG디스플레이가 세계 1등이 아니었나요?
그랬죠. 성과가 좋으니 격 달로 보너스가 나왔어요. 홀수 달에는 월급만 나오고, 짝수 달에는 보너스가 반드시 나왔어요. 그런데도 내 정신은 나아지지 않더라고요.
“정신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우울증 비슷했어요. 죽을 거 같아서 머리를 빨강, 노랑, 초록으로 염색하기도 하면서 버텼죠.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나요?
그랬지만 나갈 수는 없으니 이것저것 다 배웠어요, 학교도 다녔죠. 너무 못 견디겠으니까. 답답하니까. 우드 페인팅, 가죽 공예 배우고, 바리스타 자격증, 그래픽스 자격증, 엑셀 자격증을 땄습니다. 공장에 다니면서 배운 것들인데 그때 다 배웠던 것들을 지금 다 활용하면서 살아요. 그냥 허투루 배운 건 없더라고요.

직장을 다니면서도 대학을 다니고, 배우고, 자격증을 따는 건 다른 돌파구를 계속 찾았다는 의미죠?
그렇죠. 계속 찾았죠. 이게 내 일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나갈 자신은 없고, 부모님도 “네가 고등학교 학력으로 거기서 나와 뭘 하겠냐”고 하셨으니까요. 그런 말 들으면 두렵잖아요. 어디 나가면 그냥 어린 여자애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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