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벤처캐피털(VC) 도움도 전혀 받을 수 없었죠. 퇴직금 털어서 농기계 창고에서 유전자 합성 기술을 국산화하려고 고군분투했던 게 창업의 시작이었습니다.”

11일 대전시 한국과학기술원(KAIST) 본원 KI빌딩에서 열린 ‘2025 혁신창업국가 대한민국 국제포럼’에서 박한오 바이오니아 회장은 33년 전인 1992년 한국 최초의 바이오 벤처인 바이오니아를 창업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박 회장이 농기계 창고에서 전기·수도 공사까지 직접 하면서 키운 바이오니아는 올해 연 매출 3000억원을 바라보는 유전자 기술 토털 솔루션 기업으로 성장했다.
박 회장의 시작도 연구자였다. KAIST에서 화학과 석·박사 학위를 딴 뒤 같은 대학 생명공학연구소(현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DNA 합성 기술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한 게 사업의 출발점이 됐다. 그가 후배 연구자들에게 전하는 창업 노하우는 ‘기술’에만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박 회장은 “지난 30여년간 기술 창업의 많은 사례를 봐왔는데, 핵심은 기술보다 고객 가치에 집중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는 결국 핵심 기술도 누군가 돈을 주고 사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300조원 중 딥테크 투자에 80%, 한국은?
중앙일보와 KAIST, 서울대가 ‘혁신창업 클러스터의 길’을 주제로 연 이번 포럼에선 혁신 창업 동력이 부족한 한국 경제에 대한 뼈아픈 진단도 이뤄졌다. 오상록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은 “한국의 10대 기업은 20년 전과 비교해 거의 변화가 없지만, 미국은 상위 10개 기업 중 마이크로소프트(MS)만 제외하고 모두 바뀌었다”며 “글로벌 시장이 변하고 산업의 큰 판이 변하고 있는데 한국이 새로운 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더 큰 문제는 한국의 벤처 투자 금액(13조원)은 미국(306조원) 벤처투자 금액의 20분의 1도 안 된다”며 “10대 딥테크(deep-tech·첨단 기반기술로 승부하는 기술집약형) 분야에 대한 투자 비중도 30%에 불과해 미국(80%)과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의 원인으로 연구개발(R&D) 성과가 사업화로 이어지지 않는 한국의 ‘R&D 패러독스’ 문제를 꼽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공 R&D 성과를 시장 수요에 맞게 사업화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오 원장은 “독일의 막스플랑크협회나 일본의 리켄과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초과학 연구기관들은 기술사업화 조직(TLO)을 공공 조직에서 분리해놨다”며 “공공 조직은 그 특성상 기술 사업화의 질적인 측면보다 양적인 측면에 집중할 수밖에 없어서인데, 한국도 이 같은 사례를 참고해 시장 원리를 따르는 TLO를 육성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이틀째인 포럼에서는 기술 기반 스타트업들이 사업화 과정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목소리도 나왔다. 인공지능(AI) 기반 건강관리 솔루션 업체 정션메드의 박지민 대표는 “스타트업이 개발한 기술이 연구실 밖으로 나가려면 공공에서 테스트베드 역할을 충분히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런데 대부분 기관은 이미 실증이 완료된 제품과 서비스만 원하고 있어 ‘퍼스트 펭귄’(선도자)으로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토로했다.
“캐비어로 알탕 끓이지 말라”

딥테크 스타트업들의 기업설명회(IR) 세션에선 심사위원들의 날카로운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인공지능(AI) 기반의 로봇 설계 역량을 갖춘 스타트업 노만의 문정욱 대표가 스마트팜 분야에서 사업화를 추진한다고 발표하자 심사위원으로 나선 김판건 미래과학기술지주 대표는 “좋은 캐비어로 알탕을 끓이는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농업 종사자들이 새로운 기술에 많은 돈을 투자하지 않는 경향이 짙어 앞서 스마트팜 분야에 뛰어든 국내 기업 중 성공한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며 “노만이 가진 AI 기술을 제조업 분야에 활용해보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문 대표는 “우리 역시 고민하는 지점”이라며 “거창하게 실패하더라도 일단 시도해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