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징동루·중샤오푸싱 같은 번화가는 밤늦게까지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만나는 기업인들은 여유자금을 투자할만한 곳을 소개해달라고 하고요.”
최근 취재차 만난 김준형(55) 써니컨설팅 대표는 “과거 한국 경제가 잘 나갈 때 서울과 비슷하다”라며 대만 타이베이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대만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20년 넘게 대만을 오가며 사업을 이어온 대만통(通)이다. 김 대표는 “대만 기업인은 한국에 경쟁심리가 있었는데, 이제는 한국을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는 느낌을 받는다”고도 했다.
경기침체 때 진보정부가 재집권
대만, 친기업정책으로 부활 발판
한국은 ‘기업 옥죄기’ 우려 커져
대만 정부의 발표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대만은 지난달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당초 전년 대비 3.1%에서 4.45%로 1.35%포인트나 올렸다. 한국(0.9%)과의 성장률 격차는 더 벌어졌다. 특히 대만은 내년 2.81% 성장하면서 한국·일본에 앞서 1인당 GDP 4만 달러 시대(4만1019달러 추정)를 열 것으로 내다봤다.
사실 대만 경제가 주목받은 건 비교적 최근이다. 2003년 한국에 1인당 GDP를 역전당한 대만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정보기술(IT) 경쟁력까지 뒤처지면서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가운데 최약체로 전락했다.
2016년을 대만 부활의 시발점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민주진보당(민진당) 차이잉원 총통의 집권 첫해다. 정치적으론 진보 성향이 두드러졌지만, 그는 경제에선 친기업·친시장을 내세웠다. “기술이 대만 안보의 보장판” “민간 기업이 일자리 창출의 주인공”이라는 구호로 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산업 단지에 금융·세제·용수·전력·인력 지원을 묶은 패키지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업계가 반도체 인력 공급 부족을 호소하자 대학에 반도체 전공 신입생을 1년이 아니라 6개월마다 한 번씩 뽑도록 했다.
산업구조도 대기업 중심으로 틀을 다시 짰다. 한때 일부 국내 진보학자들이 대만처럼 중소기업 중심의 나라가 좋은 경제구조라며 ‘대기업 해체론’을 들먹였지만, 이제 ‘한국은 대기업, 대만은 중소기업 중심’이라는 얘기는 옛말이다. 현재 대만엔 TSMC뿐만 아니라 애플 기기를 독점 제작하는 폭스콘, 모바일 AP 점유율 세계 1위인 미디어텍, 아시아 최대 민간 석유화학 그룹 포모사플라스틱 등 세계적인 대기업이 즐비하다.
살펴보면 ‘2016년 대만’과 ‘2025년 한국’은 묘하게 닮았다. 당시 대만은 지금의 한국처럼 수출둔화와 내수침체의 늪에 빠졌다. 대만은 한계에 부닥친 느낌, 한국은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었는데, 주어만 바꾸면 양국 경제는 9년의 시차를 두고 판박이다.
정치적으로는 보수 정당을 누르고 진보 정당이 재집권한 첫해라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잉원에 이어 라이칭더 현 총통까지 민진당은 2016년 이후 내내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진보는 성장보다는 분배를 중시한다’는 통념을 깨고, 실용주의에 입각한 친성장 정책을 펼친 덕분에 대만 경제의 체질 개선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재명 대통령도 이른바 먹사니즘·잘사니즘 같은 성장과 실용주의를 정책 기조로 내걸고 있다. 기존 한국 진보정권과는 결이 다르다.
평행이론이 작동한다면 한국 경제는 올해 9년 전 대만처럼 재도약의 기반을 마련할 테다. 하지만 최근 정부·여당의 움직임을 보면 괜한 김칫국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불법 파업 조장 우려가 높은 ‘노란봉투법’, 대주주 경영권을 위협하는 상법 개정안 등 반(反)기업 법안을 강행하면서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골자로 하는 3차 상법 개정 등 입법 테이블에 올려둔 다른 ‘기업 옥죄기’ 법안도 수두룩하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은 양국의 간극이 이미 확연히 벌어져 있다. 대만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20%로 한국(내년부터 25%)에 비해 크게 낮다. 한국의 지방세까지 감안하면 격차는 7.5%포인트다. 노동여건을 보더라도 대만은 근로자 파견대상에 제한이 없고, 연장 근로시간도 한국보다 유연하게 적용한다. 기업이 경영 상황에 맞춰 인력을 활용할 수 있다. 대만에선 3~4년이면 완성되는 반도체 신공장이 한국은 온갖 규제와 지역 민원에 7~8년이 걸리는 게 현실이다.
2016년 차이잉원의 취임사에는 ‘경제’라는 말이 31번이나 나온다. 첫 번째 과제를 ‘경제구조의 변화’로 내세우면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활성화해야 경제 침체를 극복할 수 있다. 수출·내수를 양대 축으로 기업 생산과 민생이 상호 이익을 추구하고, 대외 무역과 지역 경제를 긴밀히 연계하겠다”고 했다.
한국 정부가 그의 취임 이후 경제정책을 참고했으면 한다. 진보 정권에서 펼친 친기업·친시장 정책 덕에 대만 경제의 체급을 키웠다는 점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