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 ‘불꽃야구’를 4년째 보고 있다. 불꽃야구는 은퇴해서 잊힐 뻔한 프로 선수와 기회가 간절한 아마추어의 진지한 콜라보로 인기를 끌어 왔다. 주로 고등학교나 대학교의 야구단 같은 아마추어 팀을 상대로 경기하는데, 이긴 경기 후에는 가장 공이 큰 선수를 MVP로 뽑는다. 얼마 전 경기에서는 불꽃야구단에서 가장 나이 많은 선수가 MVP를 받았다.
누구나 현직에서 물러날 때 올 것
여행하면서 맛집 탐방을 하거나
용돈 받으며 손주 돌보게 될수도
쉽지 않지만 무엇보다 말 줄여야

은퇴한 지 5년이 넘은 마흔 중반 선수가 수상 소감을 말하는데 같이 울컥했다. 그 선수는 MVP를 받은 경기 전에 꽤 길게 부진한 성적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 진짜 야구를 내려놔야 할 땐가, 지금이 그 땐가라는 생각을 했는데…감독님 생각은 다르시더라고요. 감독님은 절 놓지 않으셨습니다”라는 말에 복잡한 생각들이 스쳤다. 살면서 가장 잘하던 것을 그만둔다는 것, 평생 해 오던 일을 멈춘다는 결정의 무게와 소회가 갑자기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화는 25세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신체의 활력이 좋아지는 기간과 나빠지는 기간을 비슷하게 겪고 보니, 좋아질 때는 당연한 것이라 귀하게 여기지 않았고 나빠지는 중에는 그저 답답하게만 느끼는 것 같다. 마치 젊을 때 처음 듣고 이제야 와 닿는 노래 가사처럼 말이다. “젊은 날엔 젊음을 잊었고 사랑할 땐 사랑이 흔해만 보였네.” 내리막길이 확연히 느껴지는 때에야 “눈물 같은 시간의 강 위에” 추억 한 다발처럼 떠내려가지 않을 궁리를 하게 된다.
은퇴의 서글픈 점은 그 시기를 내가 정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법이나 제도로 직에서 물러나는 나이가 정해져 있는 경우도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정한 은퇴는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은퇴는 사회적 쓸모를 다한 때가 아닐까. 돈을 받든 아니든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현실이 더 냉정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주된 일자리에서 물러나도 사회적 쓸모를 갖고 있으면 은퇴를 늦출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걸 원할 때 한해서다.
공부가 직업인지라 특히 기억력이 떨어지고 단어나 표현이 예전처럼 떠오르지 않는 것이 위협으로 느껴진다. 그래도 호기심이 여전하고, 새로 알게 된 것을 전부터 알던 것들과 연결해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게 쓸모가 있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현재 직을 수행하기에 부족한 시점이 분명히 올 것이다. 외면하고 있었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은퇴 준비 말이다.
이성적으로 봤을 때 당연히 먹고살 문제부터 점검에 들어가는 게 맞지만, 방송 보고 말랑해진 감성으로 시작한 생각이라 퇴직하면 하루하루를 뭘 하며 보내는 게 좋을까 상상해 보았다. ‘시간이 정말 많다면’이라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생각을 해보니, 완전히 공백 상태였다. 잠이나 실컷 자면 좋겠다고 바란 적은 있지만 의무에 얽매이지 않은 생활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아마도 40대까지는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비슷하게 느낄 것 같다.
배운 게 경제학이라 또 다른 쓸모를 떠올리고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아이들이 커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으면 엄마가 봐주겠노라고 한참 전부터 약속한 바가 있었다. 내가 받은 게 있으니 나도 베풀어야지라는 생각이었다. 아이를 갖는 두려움을 덜어 주고 싶기도 했다. 다행히 대한민국이 발전하는 동안 ‘돌봄’ 시장이 커지고 돌보는 노동의 가치도 높아져서, 가족을 돌보더라도 예전처럼 당연시하고 크게 고마워하지 않는 분위기는 사라진 것 같다. 여건이 되면 용돈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자면 아이들이 아이를 가져야 할 텐데.
정말 은퇴를 한다면 뭘 하고 싶을까. 너무 많은 변수들이 떠올랐다. 우선 배우자다. 언젠가 우연히 문정희 시인의 ‘겨울 일기’라는 시를 접하고 각성된 바가 있었다. “나는 이 겨울을 누워서 지냈다/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이 겨울 누워서 편하게 지냈다” 이렇게 편해지고 싶지는 않으니 건강 걱정이 끊이지 않지만, 상대방 건강 걱정이 내 건강을 해칠까 또 걱정이다. 변수들을 무시한다면 차 타고 기차 타고 이곳저곳 가보고 싶다. 지역 맛집들을 찾아다니며.
불꽃야구 최고참 선수의 감동적인 MVP 수상 소감은 그러나 뒤의 상당 부분이 편집되었다. 여든이 넘은 감독이 시계를 볼 만큼 길어졌기 때문이다. 점점 다가오는 은퇴에 말을 줄여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한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민세진 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