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비포장길…긴축 고통에 저항도 여전

2025-05-15

반세기 포퓰리즘, 금단현상은 아직 ④

구조조정 타격입은 취약층 반발

과격파와 합세해 폭력시위 나서

‘돈 크라이…’ 에비타 향수도 잔존

“이대로 그냥 죽으라는 거냐.”

시위대 맨 앞에서 악에 받친 고함이 터져 나온다. 지난 3월12일 오후 아르헨티나 국회의사당 앞. 연금개혁 반대 시위대의 밀라그레스 에레라(41)는 “어머니가 무료로 약을 받았는데 정부가 빼앗아갔다”고 목청을 높였다. 시위대는 ‘또라이 자유주의자’라는 “리베르톤토(Libertonto)”를 연신 외쳐댔다.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을 향한 욕이다.

훌리건과 전문 시위꾼들이 가세해 폭력 시위로 번지자 경찰은 물대포·최루탄·고무탄으로 진압했다. ‘맑은 공기’라는 뜻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은 매캐한 최루가스와 펑펑 터지는 고무탄 발사음으로 뒤덮였다. 현지 사진기자 파블로 그리요는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중태에 빠졌다. 본지 취재팀 장열 기자도 종아리(사진) 등에 고무탄 세 발을 맞았다.

30년간 미래로여행사를 운영 중인 정유석 대표는 “페론당의 퍼주기 정책에 길들었는데, 밀레이가 바꾸려다 보니 반발이 심하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일부에선 페로니즘의 향수를 못 버리고 있다. 놀면서 쉽게 보조금을 받았는데, 갑자기 끊으니 반발할 수밖에. 우버 기사 메히야 헤리베르토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밀레이를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욕한다”고 했다.

개혁의 금단현상은 주로 취약계층에서 비대칭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그 고통의 신음은 매주 수요일 열리는 시위에서 연신 터져 나온다. 다만, 격렬한 시위 현장에만 빠져들면 개혁에 호응하는 또 다른 큰 흐름을 놓치기 쉽다. 아르헨티나 최대 회계법인 리식키리트빈의 세자르 리트빈 대표는 나무와 숲을 함께 보라고 한다.

“정부 보조금에 기대 살려던 사람들이 저항하는데, 그 수는 점점 줄고 있다. 그들이 많지는 않지만 대단히 폭력적인 성향을 지닌다. 자신의 몫을 침해당한다는 의식, 자신의 삶이 바뀐다는 피해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저항하고 시위하는 것이다.”

긴축에 대한 반발은 시위로만 표출되는 게 아니다. 불만과 저항심리가 뭉근하게 끓고 있는 곳이 있다. 교육 현장이 그렇다. 밀레이 취임 직후 교육부는 졸지에 타 부처에 흡수되고, 대학 보조금도 끊겼다. 국립대의 연구 프로젝트, 캠퍼스 공사들이 딱 멈춰섰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에서 북서쪽 30마일 거리의 국립대 UNPAZ도 그런 케이스다. 짓다 만 캠퍼스 건물이 가림막으로 둘러쳐져 있다. 최신 체육시설을 만들어 학생과 지역주민에게 개방할 예정이었는데 예산이 끊겨 중단 상태다. 다리오 쿠신스키 총장은 답답해한다.

“대학에 대한 정부의 역할이 있다. 그간 정부가 대학의 교육과 연구를 다 지원해 왔다. 이게 밀레이 때문에 끊겼다. 가장 좋은 투자가 연구개발인데 그걸 못하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학생들 역시 밀레이를 곱게 볼 수 없다. 본관 로비 벽면엔 온통 페로니스트와 좌파 단체 포스터들로 빼곡하다. UNPAZ는 서민층 자제들의 고등교육을 지원하는 대학으로, 재학생 대부분이 집안의 첫 번째 대학생들이다. 재학생 칸델라리아(23)는 “과거 어느 정부도 우리 같은 사람들에 신경을 안 썼지만, 밀레이 정부는 특히 서민층을 돌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개혁을 환영한다는 재계에서도 각론으로 들어가면 불만이 적잖다. 특히 법인세나 준조세보다 관세를 덜커덕 먼저 내린 탓에 수입품이 밀려들어 국내기업 다 죽게 생겼다고 아우성이다. 한국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산업연합회(UIA) 마르틴 라팔리니 회장은 “자유롭게 경쟁하라면서 국내 기업들만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건 외국 기업들과 같은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도 진짜 경쟁하고 싶다”는 말을 서너 차례 반복했다.

개혁의 큰 성과인 페소화 안정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니다. 페소 강세의 그늘이 슬슬 짙어지고 있다. 수출품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수입품이 밀려들고 있다. 쇠고기 먹으러 여행 간다는 아르헨티나에 곧 쇠고기가 수입될 판이다. 해외소비는 성큼성큼 늘어 지난 1월 해외 신용카드 사용액이 7년만에 최고치(6억4500만 달러)를 찍었다. 그러니 경상수지 적자는 자꾸 불어 가뜩이나 모자라는 외환보유액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 3월 경상수지 적자는 16억7400만 달러로 밀레이 취임 후 최대폭이었다.

그런데도 페소가 강세인 건 정부의 개입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이 강력하고, 시장도 이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자유지상주의자 밀레이도 외환시장만큼은 꽉 움켜쥐고 있다. 이게 과도기적 역설인지, 곧 깨질지 모를 살얼음판인지, 시간이 좀 지나봐야 알 수 있다.

개혁 성과를 유보적으로 보는 이들도 적잖다. 최근의 개선된 거시경제는 충격요법에 따른 반짝효과라는 논리다. 한국의 산업은행 격인 방코 나시옹의 에두아르도 헤커 전 행장은 ‘표면적’이라고 평가한다. “국제 경쟁력은 더 높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통해 확보되는데, 아직 그런 변화가 시작되지도 않았고, 경제를 보다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없다.”

페로니스트 정부에서 산업부 장관(2019~22)을 지냈던 마티아스 쿨파스는 과도한 긴축의 영향을 지적한다. 밀레이의 긴축은 너무 가혹해 인프라, 연구개발 등 미래를 위해 필수적인 부문에 타격을 준다는 것이다. 또 에너지 보조금 삭감에 따른 부담이 가계 부문으로 전가되고 있다고 했다.

“도로, 교량 등 인프라가 빠른 속도로 노후화되고 있다. 얼마 전 바릴로체에 휴가 갔다 움푹 팬 도로 때문에 사고당할 뻔 했다. 에너지 보조금 삭감은 가계의 구매력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며, 경제 성장세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쿨파스와 같은 시기에 산업부 산업정책국장을 역임한 리안드로 모라 알폰신도 현재 상황을 “매우 우려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극단적인 정책 추진으로 갈등과 대립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국민들의 물질적 생활 조건과 관련된 문제에 부딪혀 결국 한계를 맞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래된 생활의 타성과 깊이 뿌리내린 인식을 바꾸긴 쉽지 않다. 어느 나라, 어느 방향의 개혁에서도 반발과 저항은 거쳐야 할 과정이다. 게다가 아르헨티나에선 다른 나라엔 없는, 특이한 정서가 개혁의 발목을 끈끈하게 휘감고 있다. 바로 에바 페론에 대한 향수다.

페로니즘이라 하면, 후안 페론 전 대통령보다 두 번째 부인 에바 페론을 먼저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그는 1940~50년대 서민과 노동자들의 우상이었다. 강한 카리스마의 연설과 통 큰 복지로 성녀처럼 추앙받았다.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해 뭐든 다 해주겠다는 국모로서의 시혜가 국가 복지정책으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포퓰리즘으로 번졌다. 그 달콤한 온정이 국가 쇠락의 연결고리였다는 점은 잊혀진 채 낭만적 회고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그 자취는 지금도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콜레타 공동묘지의 에바 페론 묘소(사진)엔 늘 꽃다발이 놓여 있다. 내외국인 모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오면 꼭 거쳐가는 성지가 돼 있다. 국회의사당엔 그를 기념하는 여성의원 전용 회의실도 마련돼 있다. 에바 페론의 초상·유품·흉상이 전시돼 있다. ‘에바 페론’ 간판을 내건 레스토랑·술집도 성업 중이다. 이곳엔 어김없이 페론 부부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다. 대학생들로 북적이는 UNPAZ의 본관 로비엔 페론 부부를 그린 현수막과 배너가 많이 붙어 있다.

또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부의 보건부 청사엔 높이 31m짜리 에바 페론의 금속 초상(사진)이 한쪽 벽면을 덮고 있다. 페로니즘의 상징물이자, 누구나 한 번쯤 둘러보는 관광코스다. 택시 기사 다니엘 에두아르도(61)가 “밀레이가 곧 허물지 모르니 기념사진을 찍어두라”고 했다. 밀레이 정부는 그동안 보건부 청사 철거 계획을 내비쳐 왔다. 페로니즘의 색채를 빼려는 시도다. 살아 있는 밀레이가 죽은 에바 페론을 의식하고 있다.

뮤지컬 ‘에비타’의 ‘Don’t Cry for Me Argentina'는 그의 헌신을 찬미했지만, 아르헨티나는 지금 그 향수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다. 페로니즘의 늪에서 벗어나려는 개혁의 길은 어차피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다. 하지만 그 끝엔 포퓰리즘과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질지 모른다. 문제는, 과연 아르헨티나가 그 지점까지 개혁을 지속할 수 있느냐다. 밀레이의 임기와 무관하게.

□ 도움말 주신 분(무순)

기예르모 모레노 (원칙과가치 당대표)

마르틴 라팔리니 (산업연합회 회장)

세자르 리트빈 (회계법인 리식키 리트빈 대표)

에두아르도 헤커 (전 방코나시옹 행장)

마티아스 쿨파스 (전 산업부 장관)

릴리아나 프랑코 (부에노스아이레스헤럴드 칼럼니스트)

다리오 쿠신스키 (UNPAZ 총장)

실비나 카탈디 (UNPAZ 국제국장)

마리아노 토마시 (산안드레스대학 교수)

엘리오 델레 (금속산업협회 회장)

리안드로 모라 알폰신 (전 생산개발부 산업정책국장)

루시아노 볼리나가 (아우스트랄대학 아시아연구센터 소장)

알레한드로 젠타일 (테친그룹 디렉터)

바우티스타 부르디외 (킨토투자자문 애널리스트)

에르난 로메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출판사)

구스타보 에이리즈 (라플라타 시립 오케스트라 비올리스트)

마르티나 이바르 (케네디대학)

엘피나 로한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학생)

알레한드로 김 (변호사)

조애나 메사 알페르트 (콘덕토라 칼럼니스트)

이용수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

유정아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 참사관)

남선우 (코트라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장)

배성용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 부관장)

최도선 (피바디 회장)

정유석 (중남미한상연합회 대표)

강태민 (LK글로벌 대표)

케빈 강 (LK글로벌 이사)

양수민 (강남익스프레스 대표)

김광복 (전 포스코 아르헨티나 법인장)

김미숙 (부에노스아이레스 한국문화원장)

정세훈(신성교회 목사)

고훈 (신성교회 장로)

박진성 (사업가)

조연미 (사업가)

황진이 (변호사)

이 우리엘 (포스코)

캐롤라인 김 (부에노스아이레스 병원 의사)

김소희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생)

부에노스아이레스=남윤호·장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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