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지상주의 블랙홀’ 빠진 교육… 미래 인재양성 새판 짤 때 [심층기획-광복 80년, 독립에서 강국으로]

2025-09-01

입시지옥 빠진 한국

“한국 학생 뛰어나지만, 가장 불행”

OECD 학업성취도 20년간 최상위권

청년층 고등교육 이수율 OECD 1위

청소년 불안장애·자살률도 상위권에

‘사교육 천국, 공교육 무덤’

2024년 초·중·고 사교육비 29조원 최대

4세·7세 고시반, 초등생 의대반 성행

학업 중단 고교생은 22년래 최고치

미래형 인재 키우려면

복잡하게 꼬인 대입제도 개선이 첫발

글로벌 역량·디지털 문해력 중심 시대

고학력 아니라도 살 만한 시스템 구축을

교육은 한국을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한 원동력으로 꼽힌다. 광복 후 어려운 상황에서도 많은 이들이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결과 한국은 단기간에 문맹률을 낮추고 대학 진학률을 높이며 어느새 ‘교육 강국’이란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나라가 됐다.

하지만 그 이면엔 그늘도 있다.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한국 교육시스템을 ‘선진 교육’으로 평가하는 이는 드물다. 한국 교육 현장엔 과열된 사교육 시장과 학벌 지상주의, 의대 쏠림 등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뜨거운 교육 열기가 ‘대학 입시’에 집중된 모양새다. 이 같은 입시 위주 교육은 한국 사회를 좀먹는 병폐로 꼽힌다. 교육으로 큰 나라가 교육으로 병들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제 교육도 한 단계 나아갈 때라고 지적한다. ‘대입 최상위권’ 인재가 아닌 ‘21세기형’ 인재를 기를 수 있는 새 판을 짜야 한다는 것이다.

◆학업성취도 높지만 경쟁 극심

1일 교육부에 따르면 한국 청소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관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20여년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PISA는 만 15세의 수학·읽기·과학 소양 성취도를 국제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2000년부터 3년 주기로 시행되는 조사다. 가장 최근 발표된 2022년 조사에서 OECD 회원국(37개국) 중 한국의 순위는 수학 1∼2위, 읽기 1∼7위, 과학 2∼5위였다. PISA는 표본오차를 고려해 순위를 범위로 집계한다.

한국이 교육 강국임을 보여주는 지표는 더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문맹률은 광복 직후인 1945년 78%에서 1970년 7%로 급감했다. 초등 취학률이 92%까지 올라간 결과다. 국립국어원의 2008년 조사에선 문맹률이 1.7%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밖에 2023년 기준 청년층(25∼34세)의 고등교육 이수율은 69.7%로, OECD 가입국 중 1위를 차지했다. 초·중등은 물론 고등교육도 많은 이들에게 보편적인 교육이 된 것이다.

높은 대학 진학률은 한국의 교육 수준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통계이지만, 한편으론 대입에 매몰된 뒤틀린 교육열을 의미하기도 한다. ‘남들이 다 가니까’ 등 떠밀리듯 좁은 대입문을 위해 모두 경쟁에 내몰리고, 학생들은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한 문제라도 더 맞히기 위해 달린다.

2013년 한국 교육을 취재한 프랑스 언론 ‘르몽드’는 한국의 교육제도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우며 경쟁적’이고, 한국 학생들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날지 모르지만 가장 불행한 학생’이라고 평가했다. 청소년을 둘러싼 각종 통계는 이런 평가가 아직 유효하다고 말해준다. 불안 장애로 진료받은 청소년 수는 매년 늘고 있고(2020년 2만5192명→2024년 4만1611명), 청소년 자살률(2023년 기준 10만명 당 7.2명)은 OECD 가입국 중 최상위권이다. 모두 학업 스트레스가 원인인 것은 아니지만, 대입 위주 교육환경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과열된 사교육, 무너지는 공교육

매년 ‘역대 최대’ 기록을 갈아치우는 사교육 시장은 비뚤어진 교육열을 잘 보여준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초·중·고생의 사교육비 총액은 29조2000억원으로 전년보다 7.7%(2조1000억원) 늘며 통계 집계 후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고, 사교육 참여율도 처음으로 80%대에 올라섰다. 고교생의 경우 성적 상위 10% 이내 학생의 사교육 참여율(76.6%)이 전체 고교생 참여율(67.3%)보다 훨씬 높았는데, 사교육의 목적이 ‘모자란 학업을 보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보다 더 잘하기 위해서’란 것을 보여준다. 입시업계 관계자는 “현재 대입은 의대 등 선호 학과와 대학이 견고한 ‘피라미드’ 구조로 존재하고, 최상위권이 꼭대기부터 채우는 양상”이라며 “사교육 시작 시기가 점점 내려가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 초등학생 대상 학원엔 고교 과정까지 미리 끝내는 ‘의대 준비반’이 생긴 지 오래이고, 미취학 유아 대상 사교육 시장도 팽창하고 있다. 5세, 8세에 갈 학원의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행태를 일컫는 ‘4세·7세고시’란 말도 생겼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가기 전부터 암기식 교육과 경쟁적인 평가에 익숙해진다.

교육의 목표를 ‘대입’으로만 생각하는 세태는 학업 중단율로 나타난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고교생의 학업 중단율은 2.1%로 2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내신을 망친 학생들이 수능에 ‘올인’하기 위해 학교를 떠나는 경우가 늘어서다. 서울에선 특히 교육열이 높은 강남·서초·송파구의 학업 중단율이 높았다. 15년차 고교 교사 B씨는 “학교가 대입 준비 기관은 아닌데 입시 때문에 그만두는 학생이 늘어나 안타깝다”며 “이런 추세이면 공교육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인재 키울 새 교육 틀 짜야”

전문가들은 ‘판’을 바꿔야 할 때라고 말한다.

우선 거론되는 것은 입시 개혁이다. 현재 대학 모집인원 중 정시 선발 비율은 20%이지만, 수험생 선호도가 높은 서울 주요 15개 대학은 40%까지 올라간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입시비리 사태로 수시에 대한 불신이 높아져 교육 당국이 이들 대학에 제동을 걸어서다.

교육계에선 객관식 위주 수능은 암기·문제풀이식 교육을 부추기고, ‘사교육을 많이 한 학생’에게 유리해 오히려 불평등을 키우는 만큼 수능을 논·서술형으로 바꾸거나 자격고사화하는 등 힘을 빼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교육 당국도 이런 비판을 알고 있지만, 대입제도를 선뜻 건드리지 못하는 것은 수시에 대한 불신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결국 입시제도 개편은 공교육과 대입 선발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는 것이 우선이란 의견이 나온다.

고교 교사 C씨는 “현재 대입이 문제가 있다는 데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만 수시에 대한 거부감도 크다”며 “신뢰를 회복해야 꼬인 대입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두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불가능한데 많은 이들이 과도하게 대입에 집중하는 것은 사회적 낭비”라며 “해외처럼 ‘대학에 안 가도 잘 살 수 있다’는 사회적인 믿음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남기 광주교대 명예교수(교육학)는 “한국은 학생 중 상당수가 부모 배경으로 입학하는 미국 대학과 달리 학생 실력으로 대입을 치르고, 이런 구조가 학생들에게 ‘열심히 하면 된다’는 희망을 심어줬다”며 “다만 과도한 무한 경쟁과 승자독식 구조로 괴로워졌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우수 인재가 의대에 몰리는 것도 직업 보상 격차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라며 “실력이 부족한 사람도 좀 더 살 만한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사회 시스템이 받쳐 주는 ‘신(新)실력주의 사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수(교육학)는 “현재 수능은 교과 지식을 보는 표피적 학습에 머물러 있다. 챗GPT에 물어보면 답하는 것을 외워서 답하게 하는 상황”이라며 “배운 것을 삶과 직업에 적용하는 능력, 배운 것을 융합하고 성찰하는 역량 등을 길러야 하는데 지금 교육은 고차 사고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PISA 국어·수학 성적이 높다고 학업 성취도가 좋다고 말할 수 없다. 기존 교과목만 공부하는 시대는 벗어나야 한다”며 “이제는 글로벌 역량, 디지털 문해력도 중요하다. 새 시대에 필요한 기초학력이 무엇인지부터 재정의하고, 어떤 사람을 길러야 할지 세상의 변화를 교육과정과 평가에 담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유나·차승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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