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조 베팅 했는데···건설업계, 美 프로젝트 우려 확산

2025-09-09

국내 대기업들의 미국 현지 공장 신축·증설 움직임이 활발한 상황에서 취업비자 문제가 변수로 급부상했다. 현지 시공 실적 등의 낙수 효과를 기대한 건설사들은 상황을 주시하며 대응책 마련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9일 업계에 따르면 한미 관세 협상 타결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총 3500억 달러(약 487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현재 거론되는 프로젝트 상당수가 제조 공정상의 노하우 노출이나 업무상 기밀 문제로 인해 그룹 계열 건설사들이 원도급 시공사로 참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몇 년간 국내 건설업황 침체 속에서도 삼성물산·삼성E&A, 현대건설·현대엔지니어링 등의 해외 실적이 크게 늘고 순위표 최상단에 자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삼성전자와 현대차·기아, LG 등 주요 제조사들이 미국 본토 생산 공장 증설에 적극적으로 나선 효과가 컸다.

다만 최근 해당 프로젝트들이 속속 준공되거나 준공 시점이 다가오면서 올해 이들 건설사의 해외 시공 실적은 예년에 비해 급감한 상태다. 그나마 현재 진행 중인 삼성물산·삼성E&A의 미국 오스틴 Taylor FAB1 공사(삼성전자 발주, 올 연말 준공 예정)와 현대엔지니어링이 진행 중인 SK배터리공장 공사(HSAGP Energy LLC 발주, 10월 말 예정), LG배터리공장 공사(현대차·LG엔솔 발주 HL-GA Battery Company LLC, 10월 21일 예정) 등도 준공이 임박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 정부와 기업의 신규 대미 투자 약속은 건설사들의 새로운 일감을 향한 기대감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의 단속으로 드러난 취업비자 문제는 현지에서 높은 완성도를 요구하는 공정을 도맡아야 할 국내 건설사들에 큰 충격을 안기고 있다.

한국 기업이 첫손으로 꼽는 미국 현지 전문직 취업비자(H-1B) 인력을 다량으로 확보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H-1B는 추첨을 통해서만 부여되고, 암묵적으로는 미국 빅테크(Big Tech) 업체를 위한 할당이 있어 인도나 중국 국적 IT 개발자들이 대부분 가져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H-1B 비자를 가진 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건설사나 협력사에선 이보다 허가 기간이 훨씬 짧은 상용(B1, 6개월 체류) 비자나 전자여행허가제(ESTA, 90일 체류)를 통해 불법 또는 편법으로 한국인을 현지에 취업시키는 게 관행처럼 진행돼 온 것으로 파악된다.

미국 정부는 이번 단속을 통해 이 같은 단기 비자를 이용한 현지 입국 및 출장 관행에 제동을 건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 향후 수년간 미국 곳곳에서 대형 시공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 건설사들은 막막한 현실과 마주한 상황이다.

일선 건설사들은 상황을 주시하면서 대응책을 수립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대체로 이번 사태에서 문제가 된 B1·B2 비자나 ESTA를 줄이고 국내와 현지 전문업체를 통해 발급받기 까다롭지만 안전한 H-1B 비자를 폭넓게 확보하는 데 집중하는 모습이다. 또한 보안상 이유로 숙련된 현지인을 적극 채용하는 데는 여전히 거리를 두는 분위기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미국 내 현장 장기체류 인력은 정규 취업비자를 받아 근무 중이고, 단기 출장자들은 ESTA가 허용하는 90일보다 훨씬 엄격하게 기간과 목적을 준수하고 있다"며 "정부 차원에서 나오는 대책에 따라 철저하게 준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현재 출국이 확정된 인력은 L1과 E2 비자를 모두 받아 둔 상태며, 앞으로 취업비자 발급이 더욱 까다로워질 수 있다고 보고, 전문업체와 현지 상황에 관한 내용을 공유하며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대엔지니어링 관계자는 "현지 공정을 진행하는 협력사와 최초 계약할 때 미국 법률을 최대한 준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확약서와 각서를 받고 있다"며 "이 부분을 강화해 최근 발생한 구금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신경 쓸 방침이고, 취업비자 문제는 추가 확정되는 현장과 양국 정부의 움직임을 봐가면서 대응책을 수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한미 관세 협상 타결에 따른 대형 현지 투자를 위해,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특별 취업비자가 신설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미국은 캐나다와 멕시코 학사학위 이상 소지자에 비자를 무제한 발급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싱가포르와 칠레는 매년 각각 5400개, 1400개의 전문직 비자를 받고 있다. 호주는 E3 특별 비자를 매년 1만500개씩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는 현재 이런 비자 할당이 없다.

호주와 유사한 방식의 E4 특별 비자를 연간 1만5000개 발급하는 내용이 담긴 '한국 동반자 법안'은 지난 2013년 발의됐지만 여전히 미국 의회에 계류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부 차원에서 미국 취업비자 문제를 확실하게 매듭지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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