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다니는 30대 중반 김모씨는 평일은 저녁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금·토요일에는 새벽 3~4시까지 대리운전을 뛴다. 그의 유일한 휴일은 일요일 하루다. 그는 “지방에 산 아파트 값이 떨어지면서 불안감이 커졌다. 노후에 폐지를 줍는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일해야 한다는 생각에 몸이 힘들어도 부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중견 제조기업에 근무하는 30대 초반 강모씨는 퇴근 후 1~2시간씩 유니클로 박스 입하 아르바이트를 주 4~5회 한다. 하루 2시간씩 일하며 월 40만원의 고정급을 받고 작업량에 따라 최대 80만원까지 추가 수입을 얻는다. 그는 “아파트 청약을 준비 중이지만 현재 소득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투잡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서도 각종 겸업·부업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 유튜브에서는 한 달에 1300만원을 번다는 20대 택배기사가 화제가 됐다. 그는 주 6일, 하루 12시간 넘게 일하며 약 700건의 택배를 배송한다.
과거 ‘쉼포족(쉼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원할 때 휴가를 쓰지 못하거나 아파도 쉬지 못하는 직장인을 의미했다. 그러나 2025년의 현실은 다르다. ‘투잡’과 플랫폼 노동이 확산하면서, 더 많은 수익을 위해 저녁과 주말까지 스스로 휴식을 반납하고 장시간 노동을 선택하는 새로운 형태의 ‘신(新) 쉼포사회’가 도래했다. 정부와 정치권은 주 4.5일제 도입이나 새벽배송 제한 등 장시간·야간 노동을 줄이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지만, 정작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과로를 택하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본업을 마친 뒤 부업에 나서는 노동자들은 해마다 빠르게 늘고 있다. 11일 통계청 마이크로데이터에 따르면 ‘부업을 하고 있다’고 답한 근로자는 2017년 41만9000명에서 2024년 62만4600명으로 1.6배 늘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해도 9월 기준 평균 60만8000명으로 집계됐는데, 통상 연말(10~12월)에 부업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를 감안하면 올해도 최고치를 경신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욱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8월 삼성전자가 한국·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5개 국가의 Z세대 직장인(1990년대 중반~2010년대 초반 출생자) 5048명(한국 1021명)을 대상으로 한 글로벌 설문조사에서 한국은 79%가 부업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해 미국(81%)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비율을 보였다.
이들이 주로 부업으로 택하는 건 배달, 배송, 대리기사 등 플랫폼 노동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지난해 11월 발간한 '플랫폼종사자 실태조사 연구'에 따르면 2023년 플랫폼 종사자는 88만3000명에 달하는데 2022년에 비해 부업형(21.1→21.8%)과 간헐적 참가형(21.2→22.6%)의 비중이 늘었다. 조사 대상자의 36.1%는 “더 많은 수입을 얻기 위해 플랫폼 일자리를 시작했다”고 답해, 생계형 부업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본업과 부업을 병행하는 노동자들은 구조적으로 야간근로와 장시간 노동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최근 쿠팡 배송기사의 과로사 논란으로 ‘제도권 밖 근로자’의 과로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자 정부와 정치권은 새로운 규제 마련에 속도를 내는 분위기다.
민주노총은 새벽 0~5시 배송을 금지하는 ‘새벽금지배송’을 제안하고 나섰다. 최근 주 4.5일제 등을 논의하고 있는 ‘실노동시간 단축 로드맵 추진단’에서는 "밤 10시부터 오전 6시 사이 3시간 이상 근무하는 경우, 하루 총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하자"는 제안이 노동계를 중심으로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국정감사에서 “야간 노동과 다음 야간 노동 사이 최소 11시간, 가능하면 13시간의 연속 휴식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최소휴식시간제’ 도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대부분의 대책은 ‘근로시간을 규제하자’는 방향에 맞춰져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주 4.5일제나 휴식시간 의무화 같은 규제 중심의 접근은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주 4.5일제는 애초에 법정근로시간의 적용을 받지 부업 근로자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또 겸업과 부업이 일반화된 현실에서는 본업의 노동시간이 줄더라도 감소한 소득을 보전하기 위해 부업을 늘리는 경우가 많아, 전체 노동시간은 오히려 증가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부업 인구가 한국에서 빠르게 확산하는 근본적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취약한 사회안전망, 급등한 부동산, 낮은 임금상승률 등 복합적인 원인이 배경에 있다고 지적한다. 박귀천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부동산 가격은 급등하는데 임금은 그만큼 오르지 않고, 사회안전망도 부족하다 보니 ‘벌 수 있을 때 미리 벌어 둬야 한다’는 인식에 부업을 하는 사람이 느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인공지능(AI) 확산 역시 불안을 키우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김성희 L-ESG 연구원장은 “AI가 정규직 일자리까지 위협하면서 평생직장 개념이 약해지면서 노동시장 참여자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다양한 요인으로 과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근로 문제를 단순한 근로시간 규제만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유성규 성공회대 겸임교수도 "하나의 직업으로 충분히 벌지 못해 생기는 사회구조적 문제라 단번에 풀기는 어렵다"고 짚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근로자가 ‘일해서 더 벌겠다’는 의지가 있는 한 단순한 시간 규제로는 풍선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며 “하나를 막아도 플랫폼 노동이 확산된 환경에서는 더 파편화된 노동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최근 새벽배송 금지 논란에서도 이러한 현실이 단적으로 드러났다. 민주노총이 과로 방지를 위해 새벽배송 금지를 요구하자, 정작 현장 노동자인 쿠팡노조가 “0시부터 5시까지 배송을 막으면 기사와 관련 인력이 일자리를 잃고, 주간 물량이 몰려 오히려 혼란이 커질 수 있다”며 반발한 것이다. 노동시간 규제가 현장의 복잡한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을 노동자들이 먼저 지적한 셈이다. 일본도 2019년 겸업을 본업과 함께 법정 근로시간에 포함하는 법안을 검토했지만, 노동자 반발 등을 이유로 결국 무산된 바 있다.
박귀천 교수는 “근로시간 규제만으로는 이 문제를 한 번에 풀 수 없다”며 “사회보장 강화 대·중소기업간의 격차 등 이중구조 완화 등 어렵지만 근본적인 문제도 계속 풀어나가야 한다"고 짚었다.
다만 전문가들은 근로자의 자발적 선택이라 해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돼야 한다는 데는 공감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근로기준법 밖 비정형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안인 ‘일터 권리 보장법’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박지순 교수는 “현행 근로기준법은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를 충분히 포섭하거나 보호하지 못해 새로운 법적 틀이 필요하다”며 “다만 일터 권리 보장법은 근로시간·연차를 강하게 규제하고 처벌하는 방식이 아니라, ‘적정한 휴식시간 보장’을 회사와의 합의에 기반해 각 사업장에 맞는 유연한 기준을 찾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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