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글지글 곱창에 스며있는 재일한국인의 삶과 역사…14년 만에 돌아온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

2025-11-17

공연 전부터 노래 소리로 흥겨운 무대는 곱창 굽는 냄새와 연기로 가득하다. 과거 일본에선 재일한국인이나 가난한 일본인 노동자들이 배를 채우기 위해 먹던 음식이 돼지나 소의 내장이었다고 한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곱창에는 일본 사회 변두리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들의 분투 그리고 어려움을 견뎌내게 한 웃음이 스며있다.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는 재일한국인의 삶과 역사를 상징하는 곱창집을 배경으로 이국 땅에서 살아가는 경계인의 이야기를 무대에 옮겨놓는다. 1970년대 일본 간사이 지방의 가난한 동네에 자리잡은 곱창집 ‘야끼니꾸 드래곤’의 주인 용길은 태평양전쟁에서 왼쪽 팔을 잃고, 한국전쟁으로 아내를 잃었다. 그 후 현재의 아내 영순을 만나 전처와의 자식인 시즈카와 리카 그리고 영순이 데려온 미카, 영순과의 사이에서 낳은 토키오와 살고 있다. 여기에 대학까지 나왔지만 재일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번듯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둘째 사위 테츠오를 비롯한 재일교포들은 야끼니꾸 드래곤에 모여 고단한 일상을 달랜다.

이야기는 뚝배기의 국물처럼 펄펄 끓다가도, 소주처럼 씁쓸한 뒷맛을 남기며 굴곡진 삶의 결을 드러낸다. 작품에서 일본 학생들에게 심한 괴롭힘을 당하다 결국 극단적 선택에 이르는 토키오는 재일한국인의 현실을 심화해서 보여준다. 비록 가난하지만, 서로를 추스리며 작은 행복을 이어가던 가족에게 외부 세계의 차별과 폭력을 한순간에 가시화한다. 하지만 용길은 “우리는 이 땅의 사람이 아니다. 참아야 한다”는 답답한 태도를 보이는데,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그가 겪어온 역사의 무게다. 그의 제주도 고향 마을은 4·3사건으로 송두리째 사라졌고,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재일한국인들은 선택을 강요받거나 배제됐다. 조국에서조차 이방인인 이들에게는 침묵과 인내가 생존 방식이었던 셈이다.

악역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없는 작품에서 결국 이들을 비극으로 몰아넣는 것은 역사적 폭력이 작동하는 사회 구조다. 태평양전쟁, 제주 4·3사건, 재일교포 법적 지위 협정, 북송 사업 등 한·일 근현대사가 교차하는 용길의 이야기는 한 가족을 넘어 오늘날에도 공감을 이끌어내는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바람 잘 날 없는 용길네 곱창집은 재개발에 밀려 철거된다. 계절은 다시 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순간, 무대 위로 벚꽃이 내린다. “이런 날은 내일을 믿을 수 있지. 설령 어제가 어떤 날이든지. 내일은 꼭 좋은 날이 올 거 같아.” 용길은 아내 영순을 리어카에 태우고 힘차게 골목길을 오른다. 함석 지붕 위에선 아들이 팔을 흔들며 배웅한다. 이제 벚꽃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진다.

한국 예술의전당과 일본 신국립극장의 공동 기획·제작으로 2008년 초연된 <야끼니꾸 드래곤>은 2011년 재연에 이어 14년 만에 다시 예술의전당 무대로 돌아왔다. 초연 당시에도 코끝이 시큰해지는 이야기에 스며든 유머와 배우들의 에너지 넘치는 연기가 어우러져 한·일 양국에서 여러 연극상을 수상하며 호평받았다. 재일한국인 2.5세 정의신 연출(68)이 극작·연출을 맡은 이 작품은 실제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한다.

공교롭게도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오사카 만국박람회가 올해 다시 열렸다. 그 사이 한국의 위상은 전 세계적으로 높아졌고, 한·일 사회 전반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정의신 연출은 앞서 미국·호주에서 진행한 리딩 공연에서 이 작품이 ‘이민’ ‘이주민’의 서사로 받아들여지는 데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세계 곳곳에서 분쟁이 이어지고 이주민 문제가 떠오르면서, 동시대적 맥락이 더해진 셈이다.

정 연출은 지난 6일 기자들과 만나 “재일한국인의 역사, 고생스러웠던 삶이 잊혀지는 것이 아쉬워 연극으로 기록했다”면서 “최근 K팝과 한국 화장품의 유행으로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재일한국인 문제는 넘겨지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관객 연령층이 일본에 비해 젊어서 놀라웠는데 재일교포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예술의전당에서 2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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