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20일 서울 여의도 CCMM빌딩에서 열린 제2차 기업성장포럼에서 공정거래법을 비롯한 한국의 현행 규제 체제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작심 발언을 이어간 것은 한국 경제가 5년 후 마이너스성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최 회장이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해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 김도읍 국민의힘 정책위의장 등 정부 인사와 정치인들을 앞에 두고 한 1700여 단어의 인사말 중 ‘성장’이라는 단어는 23번 등장할 정도였다.
최 회장은 “한국 경제가 30년 전만 해도 9.4% 성장했는데 5년마다 1.2%포인트씩 하락해 지난해에는 2% 성장했다”면서 “2030년에는 마이너스성장으로 들어가는데, 한 번 마이너스성장에 진입하면 우리의 모든 리소스(자원)가 다 사라진다”고 경고했다.

최 회장은 성장 둔화의 핵심 원인은 새로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기업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공정거래법을 대표적 낡은 규제로 꼬집었다. 그는 공정거래법상 기업집단 규제가 성장을 촉진하기보다는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얽히는 규제 부담만 늘어나게 했으며 이 때문에 “공정거래법상 기업집단 규제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했다. 최 회장은 “지금의 규제 체계는 기업이 커지는 순간 부담만 생기고 새롭게 대기업으로 성장하려는 기업에 인센티브가 없다”면서 “그 결과 신규 대기업군이 탄생하지 못하고 기존 대기업만 시장을 순환하는 구조가 고착화됐다”고 말했다.
이는 공정거래법의 목표인 경제력 집중 문제를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할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최 회장은 “대기업집단에 새로운 플레이어가 들어오지 못하면 기존 기업만 남아 경쟁이 줄어드는 구조가 된다”면서 “어느 기업이 탈락하면 나머지가 시장을 흡수해 더 큰 집중이 일어난다”고 짚었다. 그는 “규제의 목적이었던 경제력 분산이 오히려 반대로 작동하고 있다”며 “공정거래법이 지금도 (한국의 기업) 성장 패턴에 유효한 규제인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개정하고 바꿀 수 있는지가 생각해 봐야 될 이야기”라고 했다.
또 최 회장은 한국 경제의 성장을 위해서는 인공지능(AI) 산업에 대한 투자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지만 AI 시대의 경쟁 환경은 기존 산업구조와 전혀 다른 게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AI 경쟁은 규모와 속도의 전쟁”이라며 “지금 세계에서 움직이는 투자 규모는 우리가 상상하던 차원을 넘어섰다”고 말했다. 실제로 16일 삼성·현대자동차 등 국내 7대 그룹 총수들은 2030년까지 AI·반도체·에너지 등의 사업에 850조 원에 달하는 투자를 단행하기로 발표했다.
국내에서는 전에 없던 규모의 투자 계획이지만 전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결코 많은 수준은 아니다. 오픈AI가 주도하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만 해도 총투자액이 5000억 달러(약 735조 원) 수준이며 프랑스 역시 정부 차원에서만 1000억 유로(약 183조 원)가 넘는 자금을 AI 산업에 투자하기로 했다. 최 회장은 “미국은 2조 달러 수준의 투자를 논하고 있고 글로벌 기업들도 1000억 달러 단위의 투자를 벌인다”고 설명했다.
한국이 AI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집중화된 자금과 명확한 국가·기업 공동 플랜이 필요한데 현행 금융 규제와 자본 조달 체계로는 이러한 초대형 투자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게 최 회장의 진단이다. 그는 “(기업이) 금산분리 완화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면서 “대규모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마련해달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AI 투자와 관련해 금산분리 완화 논의가 부상한 것은 지난달 샘 올트먼 오픈AI 대표가 방한한 후부터다. 정부에서 먼저 AI 인프라 구축 및 반도체 기업 투자를 지원할 방안으로 AI와 반도체 투자에 대해서는 산업 자본이 펀드를 운용할 수 있는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금산분리 완화가 검토돼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됐다. 하지만 일각에서 금산분리 완화를 두고 대기업, 특히 SK나 삼성전자 등 일부 기업에 대한 특혜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최 회장은 굳이 금산분리 완화가 아니더라도 새롭고 집중화된 대규모 자금 조달 체계가 마련된다면 상관없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생산적이지 못한 논란을 끝내려 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울러 스타트업 생태계의 정체 또한 문제로 지적했다. 최 회장은 “벤처 1·2세대 유니콘 이후 새로운 유니콘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다”며 “AI 기반 스타트업을 별도로 육성해 국가 전체의 AI 전환(AX)을 이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벤처 시장의 절대 규모가 작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을 통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