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황 모(30) 씨는 여느 때처럼 일과 후 침대에 누워 인스타그램 릴스(30초 내외의 짧은 동영상)를 넘기다가 우연히 알고리즘에 등장한 중국어 애니메이션에 시선을 뺏겼다. 소파에 몸이 갇힌 아내가 남편에게 버림받았는데, 훤칠한 쓰레기 수거꾼이 나타나 그녀를 구출해주자 감동한 그녀가 마법처럼 육신을 되찾았다는 내용이었다. 황당했지만 계속 보다보니 엉뚱한 설정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전개에 매료됐다. 특히 반전의 순간마다 반복되는 ‘쉐이칸샹(谁敢想·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부청샹(不曾想·생각도 못했어)’ 후렴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최근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중국발 밈(meme·온라인 유행 콘텐츠)과 캐릭터 등이 국내 2030세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마라탕·탕후루를 비롯한 식문화와 테무·알리 등 저가 이커머스 위주로 국내를 파고들던 중국 문화가 이제 트렌드의 최전선인 밈까지 파고든 것이다. 젊은층 사이에서 중국 문화에 대한 포용력이 높아지면서 양국 관계 개선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16일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쉐이칸샹’ 밈을 한국어로 번역해 소개한 한 인스타그램 계정은 영상을 처음 업로드한지 약 2주 만에 2만 7000명의 팔로어를 모았다. 영상별 조회수는 평균 100~200만회, 최다 430만 회에 달한다. 중국발 밈은 국내 SNS 이용자들 사이에서 꾸준히 주목받고 있다. 올 초 근엄한 표정을 한 강아지가 무협풍 노래를 부르는 ‘중국어하는 강아지’ 밈도 좋아요 11만 개를 받는 등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중국 완구업체 ‘팝마트’사의 캐릭터 인형인 ‘라부부’도 최근 한국에서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네이버에 따르면 7월 둘째주 리셀 플랫폼 ‘크림’에서 거래된 라부부 관련 거래액만 지난 7월 둘째주 한 주간 19억 원에 달했다. 가장 ‘희귀 아이템’으로 꼽히는 검정색 라부부는 발매가(2만 1000원)보다 무려 15배 이상 높은 31만 8000원에 거래되고 있다.
저가·짝퉁 공세로만 유명했던 중국이 최신 트렌드까지 꿰차게 된 건 틱톡·샤오홍슈 등 자국 SNS 플랫폼의 힘이 크다는 평가다. 특히 틱톡은 숏폼의 시초와도 같은 플랫폼으로 전세계 월간이용자수(MAU)가 16억 명에 달한다. 실제 올해 상반기 국내 디저트 업계에서 앞다퉈 출시하며 인기를 끌었던 ‘수건케이크’의 원산지는 상하이다. 틱톡에서 먼저 화제가 된 뒤 인스타그램 등으로 넘어오면서 한국에서도 유명세를 탔다.
코로나19 이후 반중 정서가 심화되는 가운데서도 젊은층 사이에선 중국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낮아지면서 심리적 장벽도 허물어지고 있는 평가다. 중국이 지난해 11월 무비자 정책을 시행한 이후 상하이는 ‘제2의 오사카’로 불릴 정도로 2030 세대에서 인기 여행지로 부상했다.
다만 중국 콘텐츠가 국내에 확산되는 것에 대한 반발도 여전하다. 한 극우 성향 인스타그램 계정은 중국 공산당이 사상을 퍼뜨리기 위해 자국 콘텐츠를 조직적으로 유통하고 있다는 취지의 음모론성 영상을 올려 1만 개가 넘는 ‘좋아요’를 받기도 했다. 김흥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 소장은 “90년대 일본 대중문화 개방 당시 우리 문화가 크게 훼손될 것마냥 다들 말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며 “기성세대의 냉전론적 시각으로 새로운 트렌드를 해석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