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무질은 소설 <특성 없는 남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목할 만하게도, 여기서는 아무 일도 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외관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실제로 중요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렇듯 단순한 일상에 숨겨진 복잡한 관계와 변화를 포착하려는 역사가 미시사(microhistory)다. 작은 대상에 꽂힌 집요한 시선을 통해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새로 드러난 사실들엔 상식과 통념을 뒤흔들 잠재력이 깃들어 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뒤집고,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역사, 그것이 미시사다.
이탈리아 역사가 프랑코 라멜라의 <토지와 방직기>는 19세기 북이탈리아 비엘라에 살았던 평범한 농민·노동자들의 일과 삶을 다룬 미시사 작품이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농촌의 뒤편의 치열한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법적 분쟁 양상들이 펼쳐진다. 그런 갈등과 분쟁은 ‘정치’라는 것이 정치가들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참여하는 일상적 과정임을 말해준다. 그렇게 미시사는 일상의 정치라는 차원을 활짝 열어젖힌다.
당장 무단결근으로 고소당하고 게으름뱅이로 비난받은 안토니오의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그는 정말 게을렀을까? 그는 농사일과 공장일을 병행한 ‘투잡’ 노동자였는데, 당시는 물가가 치솟은 때였다. 고물가 시대엔 공장에 나가는 것보다 자기 땅에서 일해 식량을 자급하는 것이 유리했다. 공장주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안토니오의 합리적 생존 전략은 공장주의 이해관계와 충돌했다. 이에 공장주는 성실함이라는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에 호소하며 ‘게으름뱅이’를 공격함으로써 안토니오의 전략을 무력화하고 정규적인 노동력 공급을 확보하려고 했다.
법정에서 아버지를 주정뱅이로 비난한 딸의 일화도 흥미롭다. 방직공 주세페는 동료들의 파업에 동참하지 않은 이른바 ‘파업파괴자’였다. 그는 시비가 붙은 동료들을 고소하고 자기편 증인으로 측량사와 지주 등 외부인들을 지명했다. 그러자 방직공 아내들이 주세페를 주정뱅이로 비난했고, 그의 딸도 그렇다고 증언했다. 딸이 아버지를 ‘배신’한 것은 마을 여성 공동체에서 따돌림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주목할 점은 방직공 아내들이 주세페를 대놓고 파업파괴자로 비난하는 대신 주정뱅이라는 비난으로 우회한 이유다. 그들은 더 높은 일반적 규범에 호소하며 그의 음주 습관을 공격했고, 이 전략은 방직공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외부 증인들에게 잘 통했다. 그런 식으로 방직공들은 파업파괴자를 ‘응징’했고, 증인들도 외면한 ‘주정뱅이’는 고소를 취하했다.
안토니오와 주세페의 사례는 진실이 상대적이고, 부분적이며, 심지어 편파적임을 말해준다. 공장주의 진실이 안토니오에게도 진실은 아니었다. 안토니오의 진실은 공장주에겐 적대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주세페의 진실은 동료 방직공들의 진실과 달랐고, 방직공들의 진실은 주세페가 증인으로 호출한 방직공 집단 밖 외부인들의 진실과 대립했다. 이상의 사실은 공장주와 노동자 사이에서, 방직공 집단 안팎에서 작동한 계급적·사회적 이해관계의 갈등을 뚜렷이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이해관계의 갈등이 직접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와 규범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게으름뱅이’와 ‘주정뱅이’로 규정된 자의 정당성은 약화되었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개인과 집단의 사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지지자에게만 호소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이해관계의 갈등에 근거한 적과 동지의 투쟁이면서도, 이를 급진적으로 뛰어넘어 공공선을 제시하고 지지자가 아닌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200년 전 비엘라의 공장주와 방직공도 잘 알고 있었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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