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너 3세' 정기선 수석부회장이 이끄는 HD현대가 쾌속순항하고 있다. 미국발(發) 훈풍을 타고 조선·방산 분야가 유례없는 호황을 맞으면서 경영 전면에 나선 정 수석부회장의 리더십도 힘을 받고 있다.
지주사 전환과 잇단 계열분리, 지난 몇 년간 승계 밑그림을 그리던 HD현대는 기회를 틈타 '차기 총수' 정기선 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서서히 지배력을 끌어올리는 '승계 정공법'을 택한 정 수석부회장은 조선업 슈퍼사이클을 타고 한층 승계 속도를 높일 수 있을 전망이다.
28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HD현대는 조선 계열사인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를 합병해 오는 12월 '통합 HD현대중공업'을 출범한다.
이번 사업재편은 한미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의 본격 가동을 앞두고 양적·질적 대형화를 통해 시너지를 극대화해 글로벌 시장에서 절대적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다.
'중복상장 논란' 일부 해소···긍정적인 시장 반응
HD현대중공업은 2035년 매출 37조원, 방산 매출 10조원 이상을 달성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HD현대 관계자는 "통합 HD현대중공업의 출범은 글로벌 1위 중·대형 조선사 간 합병이라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며 "이번 합병은 최근 주목받고 있는 방산 분야에서 사업경쟁력을 대폭 향상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일방적인 흡수합병과 합병 비율을 두고 주주들이 불만이 커지고 논란이 이는 것과 달리, 이번 HD현대중공업의 지배구조 개편은 조선·방산 육성 측면에서 설득력을 얻는 분위기다. 합병비율에 따라 HD현대미포 보통주 1주당 HD현대중공업 보통주 0.4059146주가 배정된다.
실제로 한미정상회담 후 차익실현 매물로 크게 조정을 받았던 HD현대 조선 계열사 주가는 합병 발표일인 27일에 HD현대미포 14.59%, HD현대중공업 11.32% 상승했다. 두 종목 모두 최고가를 새로 쓰면서 시장의 기대감을 반영했다.
한영수 삼성증권 연구원은 "사업재편 목적이 비교적 명확하다. 이번 합병에 재무 혹은 지배구조와 관련한 배경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양사 합병이 지주회사인 HD현대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설명했다.
시장의 긍정적인 반응 속에서 HD현대는 승계를 향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잡았다. 차기 총수인 정기선 수석부회장은 승계를 앞두고 리더십을 공고히 할 신성장동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승계 실탄을 장착할 기반을 다지는 모습이다.
표면적으로 이번 양사 합병이 직접적으로 지배구조 개편과는 연관성이 떨어지더라도 간접적으로 승계 기반을 다지는 성격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HD현대는 최근 몇 년간 중복 상장 논란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계열사 상장을 추진하면서 정 수석부회장 승계에 속도를 냈다. IPO를 통해 지배구조 개편 작업과 자금 조달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모양새다. 현재 지주사와 계열사를 포함해 HD현대그룹의 상장사만 이미 9곳에 달한다.
하지만 올해 들어 HD현대의 지배구조 개편 방향의 변화가 감지된다. 올해 HD현대건설기계의 HD현대인프라코어 흡수합병에 이어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 합병까지 지배구조가 단순화되는 모양새다.
최근 정부의 자본시장 활성화 방침과 상법개정 이슈 등과 맞물려 중복상장에 대한 비난이 거센 상황에서 불확실성을 일부 해소하고 승계 기반을 다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지분 매입' 승계 정공법···'캐시카우' 조선 역할 중요
현재 HD현대의 정기선 수석부회장은 경영 일선에 나서 그룹 내 영향력을 늘려가고 있지만, 아직 완벽하게 승계 절차를 마무리한 것은 아니다.
완벽한 승계를 위해서는 현재 6%대에 불과한 HD현대 지분 확장이 필요한 상황이다. 안정적인 경영권 행사를 위해서는 부친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지분 26.60%를 승계받는 것이 과제다.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한 지 1년 만에 수석부회장 자리에 오른 정 수석부회장은 최근 1년 사이 지분 확대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해 5월을 기점으로 꾸준히 자사주를 매입한 결과, 정 수석부회장의 지주사 HD현대 지분율은 지난해 3월 말 5.26%(415만5485주)에서 현재(이달 1일 기준) 6.12%(483만7985주)까지 상승했다.
재계에서는 정 수석부회장이 지분매입이라는 '정공법'을 택해 향후 추가적인 지분 확장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지주사인 HD현대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인 회사가 따로 없고, 이미 HD현대의 그룹 개편 작업도 상당 부분 마무리되어 분할이나 합병으로 지분율을 끌어올리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핵심계열사→HD현대→정 수석부회장'으로 이어지는 배당 구조가 사실상 승계의 핵심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슈퍼사이클을 탄 조선·방산업은 정 수석부회장의 든든한 승계자금줄이 될 전망이다. 잇단 자사주 매입으로 책임경영에 한층 무게를 실은 동시에, 사업 개편으로 유의미한 경영성과를 내겠다는 승계 밑그림이다. 향후 실적에 따라 향후 배당을 확대하면 승계재원 마련 속도도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재계 관계자는 "조선 중간지주사인 HD한국조선해양이 주주환원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겠다고 공언한 만큼 HD현대에 더 많은 배당이 이뤄질 것"이라며 "이번 사업개편에 대한 긍정적인 시장 반응 속에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정기선 체제에 힘이 실리는 모양새"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