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기의 문화기행] 화덕에서 구워낸 시간-아르메니아의 라바쉬(Lavash)

2025-05-30

음식은 때로 그 나라의 역사와 풍경, 사람들의 삶의 결을 가장 진하게 담아낸다. 아르메니아에서 만난 전통 빵 ‘라바쉬(Lavash)’도 그랬다. 얇고 부드러운 이 빵 한 장에는 수천 년의 시간이 구워져 있었고, 따뜻한 손길이 녹아 있었다.

라바쉬는 화덕의 벽에 반죽을 붙여 굽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한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얇지만, 그 속에 담긴 풍미는 깊고 풍부하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그 식감은, 인도의 난, 중앙아시아의 낭, 혹은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맛보았던 화덕 빵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라바쉬는 단순히 빵이 아닌, 아르메니아인의 정서와 공동체 문화를 상징하는 음식이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치즈나 채소, 고기 등을 라바쉬에 돌돌 말아 먹거나, 수프에 찍어 먹는다. 특별한 조미료 없이도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 조리의 풍경이다. 커다란 탄도르 화덕에 여인들이 둘러앉아 반죽을 펴고, 화덕 벽에 정성스레 붙이는 모습, 이내 구수한 향이 피어오르면, 누군가는 재빠르게 빵을 걷어내고 접는 이 일련의 동작 하나하나가 일상이면서도 의식(儀式) 같았다.

라바쉬는 튀르키예, 이란, 레바논 등지에서도 즐겨 먹지만, 유네스코는 2014년 아르메니아의 라바쉬를 인류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의 협력과 기억이 담긴 문화이기 때문이다. 빵을 굽는 일은 여성들 사이의 연대이자, 세대를 이어가는 따뜻한 의례인 셈이다.

아르메니아를 여행하던 어느 날, 좁은 골목길에서 갓 구운 라바쉬 한 장을 손에 쥐게 되었다. 화덕에서 막 꺼낸 따끈한 빵의 온기와 거기에 담긴 환대와 미소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낯선 이방인에게 선뜻 내어준 그 따뜻함은, 여행자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맛이었다.

오늘도 나는 생각한다. 빵은 역시 화덕에서 구워야 제맛이고, 음식은 결국 사람의 손과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아르메니아의 라바쉬처럼 한 장의 빵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 남는다.

권오기 여행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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