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지금까지의 특별사면(이하 특사) 조치가 정당했습니까. ②특사가 비리 정치인이나 대형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된 기업인 면죄 도구로 사용됐습니까. ③특사 제도가 법적 형평성을 해칩니까. ④특사가 너무 빈번하게 시행됩니까.
2003년 연말 법률전문가 163명과 일반인 250명이 설문지를 손에 쥔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문항들은 무엄하게도 하나같이 나라님의 은사권에 ‘딴지’를 거는 내용이었다. 그 무례한 질문을 던진 주체는 놀랍게도 관(官)이었다. 노무현 정권 첫해인 그해 법무부 의뢰로 국책연구기관인 한국형사정책연구원(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이하 형정원)이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조국·윤미향 특사가 부른 옛 제언
내란·부패·선거 사범 특사 제한
분노 넘어 특사 본질 문제삼아야
특사권은 흔히 ‘제왕적’이란 수식어가 동반되는 대통령 권한 중에서도 ‘끝판왕’에 해당한다. 사법부의 지엄한 판결을 일순간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절대 반지’나 ‘타노스의 손가락 튕김’ 수준의 가공할 권력이라서다. 왕조 시대 군주의 특권에서 유래해 말 그대로 ‘제왕적 권한’인, 그리하여 역설적이게도 ‘위헌성’이 농후해 보이는 이 헌법상의 권한은 사법권의 기본권 침해 가능성을 저지할 최후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1948년 제헌헌법에 명시된 뒤 지금까지 존속해있다.
그러나 불순한 내·외부적 요인으로 판결이 오염돼 억울한 사법 피해자가 양산되던 시절이 지나가면서 그와 같은 효용성은 거의 사라졌다. 특사가 정치·경제적 거래의 산물로 전락하면서 고조된 국민 반감은 2002년 말의 김대중 정권 마지막 특사 때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듬해 법무부가 사면법 개정 총대를 메고 나선 건 분명 용감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당시 형정원의 설문조사 결과는 국민 상식에 정확히 부합했다. 판사·검사·변호사·법학 교수 등 법률전문가들은 “특사가 정당하게 시행된 것이냐”는 질문에 74%가 “부당했다”고 답했고, “비리 정치인 구명 수단이었느냐”는 문항에 87%가 “그렇다”는 답을 내놓았다. 특사의 빈도와 관련해서는 “대체로 또는 매우 빈번했다”고 답한 비율이 무려 95%였다. 일반인 조사에서도 부정적 답변이 넉넉하게 과반을 차지했다.
형정원은 이 설문조사 결과와 외국 사례 등을 토대로 『사면제도의 현황과 재조명』(정현미, 황지태 저) 보고서를 만들어 법무부에 제출했다. “헌정질서 파괴 범죄자(내란·외환·반란·이적죄), 선거법 위반 사범, 특가법 또는 특경가법 위반 사범 중 부패 사범 관련 범죄자, 반인륜·반인도주의 사범에 대해서는 사면을 제한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왠지 한동안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정권 말이 돼서야 차(車)·포(包)·마(馬)·상(象)이 다 떨어진 누더기 개정안의 형태로 국회를 통과했다. 형정원 제언 중 살아남은 건 사면심사위원회 설치, 단 하나였다. ‘헌정 사상 첫 사면법 개정’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민망했다.
그나마 노무현 정권은 시늉이라도 했다. 이후 정권들은 특사권에 대해 아무런 문제 의식을 갖지 않았고, 자연스레 특사는 조자룡이 헌 창 쓰듯 무시로, 무분별하게 이뤄졌다. 오히려 세월의 더께가 불감증을 키우면서 특사의 금도조차 무너졌으며 그 양태는 더 뻔뻔해졌다.
그리하여 결국 명색이 새 정권의 첫 특사임에도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윤미향 전 민주당 의원 등 부적절한 정치권 인사들이 대거 포함된, 심히 낯 뜨거운 특사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비판의 목소리가 크지만, 정권은 오불관언이다. 시간이 흐르면 까맣게 잊힐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1년여쯤 지나면 정권은 또다시 후안무치로 점철된 특사를 단행한 뒤 버티기에 들어갈 것이다.
이쯤 되면 개별 특사에 일일이 흥분할 게 아니라 특사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마침 지난 13일 국정기획위원회는 새 정부의 핵심 과제들을 발표하면서 ‘개헌’을 첫머리에 올렸다. 12·3 비상계엄의 비극 이후 봇물 터지듯 쏟아진 개헌 요구의 핵심은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 축소’였다. 특사권 만한 제왕적 권한이 또 어디에 있을까.
가장 깔끔한 방법은 특사권을 규정한 헌법 79조를 건드리는 것이다. 그게 부담스럽다면 개헌 논의 과정에서 사면법 개정 논의를 병행하면 된다. 새삼스레 공들일 필요도 없다. 20여 년 전 나온 형정원의 제언만 현실에 옮겨도 그동안 뻔뻔하게 특사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들의 대다수는 걸러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이 정치인 사면으로 가장 큰 피해를 봤다”(우상호 정무수석)며 희한한 억울함을 표출할 일도 없어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