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패권’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절박하게 들렸던 시대는 없다. 과학기술은 더 이상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외교·안보·경제를 넘어 국제질서와 국가 존망을 좌우하는 핵심축이 됐다. 기술을 선점한 국가는 새로운 표준을 만들고, 뒤처진 국가는 그 표준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최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MWC(Mobile World Congress) 2025’에서도 기술패권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났다. 중국 국유기업인 화웨이는 인공지능(AI) 기반의 스마트시티 솔루션을 공개했다. 교육·교통·에너지·치안 등 도시 인프라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통합해 실시간으로 제어하는 구조다.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기술은 더 이상 생산성 향상의 수단이 아닌 도시 전체를 통제하는 도구이자 지배력의 상징이 되고 있다.
기술 뒤지면 식민지로 전락 위험
중국 ‘기술굴기’ 인재확보서 비롯
일관된 장기적 기술전략 세워야

화웨이의 기술력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국은 ‘과학 굴기(?起)’를 국가 전략으로 삼고, 2049년 건국 100주년에는 과학기술 초강국을 완성하겠다는 분명한 장기적 목표를 제시했다. 2025년 연구개발(R&D) 총투자액은 약 800조 원에 이르며, 연구 인력과 과학 논문 피인용 건수는 각각 세계 1위다. 2024년 네이처 인덱스 기준 세계 상위 10대 대학 중 8곳이 중국 대학이다. 10년 전만 해도 베이징대학 1곳뿐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변화의 속도가 놀랍다.
이 모든 변화는 결국 인재에서 비롯됐다. 중국은 ‘천인(千人) 계획’과 ‘만인 계획’을 통해 해외 석학과 핵심 연구자를 대거 영입해왔다. 천인 계획에 따라 고급 인재에게 고액 연봉과 주택·연구비를 제공해 귀국을 유도했고, 만인 계획에 따라 젊은 과학자와 응용기술 인력까지 포괄해 지원 범위를 넓혔다. 이 같은 야심 찬 전략으로 중국은 수천 명의 세계 정상급 인재를 확보하며 기술 패권 경쟁의 기반을 빠르게 다졌다.
반면 대한민국은 기술패권 경쟁이라는 외부 위기와 동시에 저출산·고령화라는 심각한 내부 위기에 직면해있다. 지난 10년간 34만 명의 이공계 인재가 해외로 빠져나갔고, 석·박사급 인재의 ‘탈(脫) 한국’ 흐름이 심화하고 있다. 생산가능인구는 갈수록 급감하고, 지역 대학과 연구기관은 인재 기반의 붕괴를 걱정하고 있다. 인프라는 있어도 인재가 없다면 기술주권은 공허한 말에 그칠 수밖에 없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기술의 특성 때문에 기술에 종속되더라도 겉으로 잘 인식하지 못한다. 특히 이웃 중국의 급성장은 조선 시대 명나라와 청나라에 500년 넘게 종속됐던 역사와 1636년 병자호란의 치욕을 떠올리게 한다. 기술 종속은 표준과 플랫폼의 의존을 통해 국가 자율권을 잠식한다. 한 번 벌어진 기술 격차는 예전처럼 따라잡기 어렵고, 위기는 빠르게 중첩되고 있다.
과거 국가의 주권은 군사력으로 지켰다면, 이제는 기술력이 방패다. 국민의 데이터, 산업 경쟁력, 미래 세대 일자리까지 모두 기술 위에서 움직인다. 기술주권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다. 기술주권을 확보하면 경제도 회복되고, 국가의 자율성과 안보도 지킬 수 있다.
정부는 단기적 성과를 노린 예산 투입을 넘어 장기적이고 일관된 과학기술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과학기술계는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로 신뢰를 얻고, 민간과 협력해 기술 경쟁력을 대폭 끌어올려야 한다. 동시에 세계 주요국을 상대로 기술 외교와 국제 공조를 강화하고, 반도체·AI·바이오 등 국가 전략기술 분야에서 영향력을 확보해야 한다. 우수 인재 양성을 위해 대학과 산업 현장을 연결하는 교육 개편과 함께 해외 유출 인재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도록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한다.
과학기술은 이제 정치의 핵심 어젠다가 됐고, 대한민국의 생존 전략이다. 정책의 일관성, 인재에 대한 과감한 투자, 국가적 실행력이 절실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기술주권 없이 국가 주권을 지켜내기 어렵다. 기술이 약한 국가는 국민의 자유도 안보도 경제적 자립도 지킬 수 없다. 기술주권은 선언이 아니라 반드시 쟁취해야 할 생존 조건이다. 지금이 바로 기술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다시 세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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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