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격 회복의 길, 우리의 아이들이 보여주고 있다

2025-11-11

지난달 사단법인 인간성회복운동추진협의회(인추협)의 초청으로 ‘사랑의 일기 큰 잔치 2025’에 참석하기 위해 국회의원회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가을 하늘은 청명했지만, 정치의 최전선인 국회에서 벌어지는 작금의 현실이 마음 한편을 무겁게 짓눌렀기 때문이다. 여야 간에 오가는 말들은 이미 정책과 비전의 언어가 아니라, 상대를 향한 조롱과 비난의 흉기가 되어 서로를 난도질하고 있다. 정치는 본래 다름 속에서 공동의 길을 열어가는 행위임에도, 지금 우리는 ‘차이’를 적대의 근거로 삼으며 사회가 지탱해온 신뢰의 토대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적대적 정치언어, 사회 신뢰 훼손

개개인의 품성·도덕이 국격 지탱

일기쓰기 행사서 본 아이들 마음

우리 어른들에게 부끄러움 안겨

문득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 깊은 상처를 안은 국민에게 화해를 호소하던 링컨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 연설(1865년 3월 4일)이 떠올랐다. 그는 승자의 자리에 서서도 “어느 쪽에도 악의를 품지 않고, 모든 이를 향한 자비로(with malice toward none, with charity for all)” 나라의 재건을 이야기했다. 피로 얼룩진 분열의 시대 속에서도 그는 서로 다른 생각과 신념을 적이 아닌 동료 시민으로 대하며, 다름 속에서 배움과 성찰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그 정신은 오늘의 우리 정치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정치는 본래 다름 속에서 타협점을 찾고, 신뢰를 바탕으로 공동의 길을 열어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랫동안 화두로 삼아 온 ‘동반성장’과 ‘국격 회복’의 목표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품격과 신뢰를 지닌 시민으로 성장하여, 서로를 존중하고 협력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만드는 일이다. 경제적 번영은 제도나 정책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지속시키는 힘은 결국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며, 신뢰는 그 중심에 자리한 덕목이다. 서로를 믿고 함께 성장하려는 신뢰가 있을 때만 공동체는 견고해지고, 국격은 자연스럽게 높아진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겉으로는 ‘경제 선진국’을 자부하지만, 안으로는 신뢰의 기반이 무너진 모습을 자주 드러내고 있다. 극단적인 정치적 분열, 세대와 지역 간의 갈등, 부의 양극화가 그 증거다. 이는 제도의 실패 이전에 인간성의 균열을 보여준다. 국격이란 외형적 위상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이 지닌 마음의 품성과 도덕적 성숙의 총합임을 성찰해야 할 때다.

그런 생각에 잠긴 채 국회 행사장에 들어섰을 때, 막혔던 가슴이 순식간에 풀리는 듯한 산뜻한 공기를 마주했다. 일기 공모로 상을 받은 아이들의 일기장과 가족이 함께 만든 포스터가 전시된 입구를 지나자, 아이들이 또렷한 목소리로 웅변과 노래를 선보이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들의 눈빛에는 꾸밈없는 진심과 따뜻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일기 속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이었지만, 자기 자신과 마주하려는 용기,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 그리고 성장의 방향을 스스로 확인하려는 진실함이 가득했다. 학교폭력과 입시 경쟁으로 메말라가는 현실 속에서도, 이렇게 매일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며 마음을 가꾸는 아이들이 있기에 우리의 미래는 여전히 희망적이다.

국가의 외형적 성과만으로는 건강한 사회를 보장할 수 없다. 그 힘은 결국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에서 비롯된다. 내가 오랫동안 지켜보고 응원해온 인추협의 ‘사랑의 일기 운동’이 특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아이가 매일 하루를 기록하고 반성하는 과정을 통해 인성을 다듬고 바른 가치관을 세워가는 가장 실천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일기를 통해 자신의 행동이 올바른 것이었는지, 타인을 배려했는지를 스스로 돌아보며 ‘나’만이 아니라 ‘우리’를 생각하는 책임감을 자연스럽게 익혀간다. 이러한 성찰의 누적이야말로 공동체의 품성을 회복하게 하는 힘이다. 실제로 일기쓰기를 꾸준히 실천한 학교들에서 학교폭력이 사라지고 자살률이 유의미하게 낮아졌다는 보도는, 그 효용을 명확히 보여주는 반가운 증거다.

진실한 기록, 정직한 성찰, 타인을 향한 따뜻한 마음은 결국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윤리의 기초다. 정쟁에 몰두하며 국격을 깎아내리고 있는 정치인들과 기성세대는, 지금 아이들이 보여주는 이 ‘작은 성찰의 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국격 회복의 출발점은 먼 곳에 있지 않다. 그것은 거창한 개혁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한 사람의 마음을 다시 가꾸는 일에서 시작된다. 국격은 경제 규모나 군사력으로 측정되지 않으며, 바깥에 내보이려는 잘 다듬어진 얼굴이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마음의 깊이와 품성의 총합이다.

국격을 되찾는 길을 이미 걷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길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 어른들은 이제 그들이 밝혀주고 있는 성찰의 길을 따라 함께 걸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뢰와 따뜻한 인성으로 세워지는 건강한 사회로 가는 첫걸음이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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