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의 상징이던 국기가 이제 극우의 깃발로 변하고 있다. 미국에서 시작된 ‘국기의 정치화’가 유럽으로 번지며 민족주의와 배제의 상징으로 국기를 활용하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2021년 1월 6일 미국 의회 난입 사태에서 폭도들이 성조기를 흔들며 의회를 부수던 장면이 상징적인 단면이었다. ‘국기의 극우화’는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 영국에서 커진 이 움직임은 네덜란드·독일·포르투갈 등으로 확산했고 극우 시위대는 자국의 국기를 내세워 “국가를 되찾자”고 외치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영국 전역의 극우·반이민 시위 현장에서 잉글랜드 국기인 성조지 십자기가 사용되고 있다. 지난 8월 대규모로 벌어진 반이민 시위에서 참가자들은 난민 숙소로 사용 중인 호텔에 반대하고 이민자 추방을 요구하며 이 붉은 십자가 깃발을 흔들었다. 이들은 이른바 ‘국기 게양 운동’을 통해 전국의 가로등에 수천 개의 성조지 십자기를 걸었고 버밍엄 등 일부 도시에서는 교차로 바닥에 십자 문양을 직접 그려 넣었다.
영국 극우 세력이 시작한 국기 게양 운동이 유럽 전체로
성조지 십자기는 애초 1300년대부터 잉글랜드를 상징해왔지만 20세기 이후에는 영국 전체를 대표하는 유니언잭이 더 널리 쓰였다. 펍이나 축구장에서만 보이던 이 깃발이 정치적 상징으로 변질된 것이다. 영국 싱크탱크 브리티시퓨처의 선더 캣왈라 소장은 워싱턴포스트에 “느슨한 의미와 보편성 때문에 극우 세력이 ‘이건 우리의 깃발’이라고 주장할 여지를 만들었다”고 했다.
스코틀랜드에서도 국기의 정치화가 뚜렷해지고 있다. 파란 바탕에 흰색 X자 십자가가 그려진 스코틀랜드 국기 솔타이어는 그간 독립 찬성 세력의 상징으로 여겨졌지만 지난달 반이민 시위 현장에서 유니언잭과 함께 등장했다. 당시 글래스고 중심가에서 열린 집회 참가자들은 “(난민) 보트를 멈춰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솔타이어를 흔들었다. BBC는 “반이민 시위에서 솔타이어가 등장한 것은 ‘누가 진짜 애국자인가’를 둘러싼 새로운 국가주의 경쟁의 한 장면이 됐다”고 분석했다.

네덜란드 국기도 극우 세력과 반이민 시위대의 상징으로 변질되며 사회적 갈등의 중심이 되고 있다. 현지 매체인 더치뉴스에 따르면 지난달 11~12일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반이민 시위에서는 적·백·청색의 네덜란드 국기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친나치 단체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운동’이 사용했던 황·백·청색의 프린센플라흐까지 등장했다. 네덜란드 기학(旗學)협회 회장인 다비드 판 베를로는 “일부 단체들이 ‘깃발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진짜 네덜란드인이다’라며 국기를 독점하려 한다”며 “그런 태도는 ‘우리’의 범위를 점점 더 좁고 배타적으로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논란 속에 국기 매출도 늘고 있다. 국기 제작사인 플라헌위니 측은 최근 몇 달 사이 적·백·청색 네덜란드 국기 판매가 약 25% 증가했으며, 사용이 줄었던 프린센플라흐의 수요도 다시 늘고 있다고 전했다.

극우 정당들은 시위대 못지 않게 국기를 적극적으로 정치에 이용하고 있다.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은 지난 4월 실질적 지도자 마린 르펜 의원이 공금 유용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공직 출마가 금지되자 항의 집회를 열었다. 조르당 바르델라 RN 대표는 판결을 “정치적 숙청”이라고 규정하며 군중을 선동했는데 연단에 앉은 정당 관계자들은 국기 색상과 맞춘 어깨띠를 착용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청·백·적색의 프랑스 국기 트리콜로르를 흔들며 정부를 향해 “사법 독재를 멈춰라”고 소리쳤다. 자유·평등·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가치를 상징하는 국기의 세 가지 색이 이날 집회에서는 극우의 분노와 피해의식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 것이다. AP통신은 국기가 이용된 이날 집회를 “사법 불신과 반체제 정서를 결집하는 정치적 퍼포먼스”로 평가했다.

포르투갈 극우 정당 셰가의 안드레 벤투라 대표는 집회와 연설에서 국기와 자신의 얼굴이 함께 인쇄된 깃발을 내세운다. 독일의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 역시 국기를 전면에 내세운 상징 전략을 사용한다.
유럽이 국기에 신중한 이유 -- 제국주의의 그림자
미국인들이 성조기를 기념품이나 의류 등에 활용하는 것과 달리, 유럽인들은 국기를 훨씬 신중하게 다뤄왔다.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애국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때 그것이 얼마나 쉽게 광기로 변할 수 있는지를 배웠기 때문이다. 국가적 위기나 축제, 스포츠 승리가 없는 한 유럽에서 개인이 국기를 흔드는 일은 드물다. 도시의 발코니에는 자국 깃발보다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 국기가 더 자주 걸린다.
극단적 애국주의자들이 이같은 ‘깃발의 공백’을 파고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기가 자신들을 ‘조국의 수호자’로 내세우는 극우 세력의 손에 들어가면서 통합의 상징이던 깃발이 분열의 도구로 변하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자유주의 진영을 자극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국기에 대한 존경심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 곧바로 “비애국적”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영국에서 시작된 극우 세력의 국기 게양 운동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하며 ‘깃발 정치’가 퍼지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두고 “마마이트(호불호가 갈리는 영국의 스프레드) 이후 유럽에 전해진 가장 달갑지 않은 영국산 수출품”이라고 평했다.
이런 도발에 맞서 중도 성향의 지도자들이 ‘국기 되찾기’에 나서고 있다. 노동당 출신의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연설 때마다 유니언잭을 배경으로 내세우며 애국심을 강조하고 있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도 “새로운 민족주의적 증오를 부추기려는 자들에게 국기가 탈취되고 남용돼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네덜란드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중도 좌파 정당 민주66의 롭 예턴(38) 대표는 선거 운동에서 국기를 활용했다. 유럽통합을 지지하는 젊은 자유주의자인 그는 유럽연합 깃발 대신 극우 세력이 점유해온 네덜란드 국기 앞에서 총선 승리 연설을 했다. 그는 이같은 이유에 대해 “국기의 상징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며 “우리가 우리 나라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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