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국제영화제 초청작 <봄밤>
배우이자 무용수인 한예리와 김설진의 열연 돋보여
“독립영화 출연은 일종의 사치”

젊은 나이에 죽음을 앞둔 연인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9일 개봉한 영화 <봄밤>속 주인공 두 사람의 삶은 병으로 피폐해졌고, 기댈 곳은 상대 방 뿐이다. 이들의 사랑은 처절한 만큼 애틋하다.
‘영경’(한예리)은 남편과 이혼하며 아들 양육권을 빼앗겼고, 술에 빠져 살다 국어교사 일까지 그만두게 됐다. ‘수환’(김설진)은 전처의 배신으로 신용불량자 신세가 된 데다,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투병한다. 친구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하기로 한다.
<봄밤>은 권여선 작가가 쓴 동명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를 만든 강미자 감독(59)은 시나리오를 구상할 때부터 배우와 무용수 활동을 함께하고 있는 한예리(40)를 주인공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남자 주인공 김설진 배우의 본업도 무용수다. 두 주인공은 병에 무너져가는 상황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데, 배우이자 무용수였기 때문에 가능한 연기였다.

지난 7일 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한예리는 “알코올 중독자를 연기하기 위해 5kg을 감량했다”며 “영경이 어떤 인물인지 해석하기보다, 어떤 마음인지 느끼고 실제로 그가 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은 곧 물이라고 생각했어요. 24시간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은, 앞에 곧 죽을 것 같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물을 마시러 떠나야 하는 거죠.” 한예리는 극 중 영경의 중독 증세를 표현하기 위해 물 중독을 걱정해야할 정도로 많은 양의 물을 마시며 연기에 임했다.

그는 상대역인 김설진 배우를 직접 섭외했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병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도 몸으로 표현해 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몸을 쓰는 훈련이 된 사람이면 좋겠다 싶었죠. 오빠(김설진)와는 대학 시절부터 알던 사이여서 믿고 부탁할 수 있었어요.” 한예리는 한국예술종합대학에서 한국무용을, 김설진은 창작무용을 전공해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로 지냈다.
오래 알아 온 두 사람의 호흡은 리허설 없이도 완벽한 합을 이뤄냈다. 진창인 길 위, 서로를 향해 달리다 못해 기어가는 장면에서 영경은 수환을 향해 기꺼이 몸을 던진다. 수환은 굳은 몸으로 갖은 애를 써 잔뜩 취한 영경을 잡아낸다. 한예리는 “정말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몸을 던졌다”며 “설진 배우가 있으니 내가 어떤 식으로 몸을 던져도 내 머리가 바닥에 닿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연습하지 않고 바로 촬영했는데, 합을 맞추고 찍었다면 나올 수 없는 장면일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두 사람의 연기는 보통의 배우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긴 대사로 상황을 설명하는 대신, 몸으로 알코올 중독자의 비틀거리는 걸음이나, 류머티즘 환자의 굽어가는 신체를 재현한다. 한예리는 “만약 무용을 하지 않은 사람이 영경과 수환을 연기했다면 전혀 다른 영화가 탄생했을 것”이라며 “어떤 동작으로 감정을 표현하면 좋을지 대본을 보고 동작과 동선을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한예리에게 무용은 연기만큼 중요하다.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는 게 무용의 가장 큰 매력이다. “얼마 전에 선우정아님의 뮤직비디오 촬영을 마쳤는데 거기서도 춤을 춰요.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배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본인을 하나의 직업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봄밤>은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혁신적인 작품을 소개하는 포럼부문에 초청돼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예리는 호평 이유를 두고 “요즘 볼 수 있는 사랑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지만, 우리가 어렸을 적 봤던 구구절절한 사랑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예전 물건을 쓰고 싶고 과거를 돌아보고 싶어 하는 마음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감수성을 영화가 건드린 건 아닐까요.”
<봄밤>은 한예리가 자신의 장편 데뷔작 <푸른 강은 흘러라>에 이어 두번째로 강미자 감독과 함께 한 작품으로, 고작 스태프 여섯이 만든 ‘초저예산’ 영화다. 드라마 <청춘시대>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영화 <미나리> 등으로 주류 영화계에서 자리잡은 한예리로선 의외의 선택이다. “일종의 의리죠” 한예리는 웃어 보였다.
“저처럼 상업 영화를 찍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더 독립영화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장이 더 작아지지 않아지도록, 영화계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요. 저는 여유가 있으니, 현장이 험해도 덜 서러워요. 오히려 이미 너무 고생하고 있는 독립영화 배우들이 안전한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았으면 하죠.”

‘현장형 배우’라고 자신을 칭한 그는 더 많은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배우는 누가 불러줘야만 가치를 가지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내가 더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누군가 불러주지 않아도 관객분들에게 무언가 선보일 방법이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