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평등한 세상 ‘나중에’ 말고 ‘지금’”···‘약자들의 입’이 된 권영국

2025-05-30

[주간경향] 2021년 2월. 파리바게뜨 제빵기사들의 노동조합인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에 탈퇴서 100여장이 접수됐다. 임종린 파리바게뜨 지회장에게 한 조합원이 말했다. “우리 노조 없어지는 건가요? 관리자들이 민주노조에 남아 있으면 불이익이 있을 거라며 탈퇴하래요. 다들 불안해해요.” 실제로 지회에 가입한 제빵기사들은 승진 인사에서 자주 누락됐다. 사측이 민주노조 없는 ‘청정지역’을 만들겠다며 회의를 열어 탈퇴 전략을 논의했다는 얘기도 돌았다. 한때 730명의 조합원이 있던 파리바게뜨 지회는 그해 6월이 되자 300여명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파리바게뜨 매장에 냉동 반죽(생지)을 공급하는 계열사 SPL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2020년 말 결성된 화섬식품노조 SPL지회는 관리자들의 회유와 압박으로 조합원이 228명에서 12명으로 줄었다. “어떻게 만든 노조인데···.” 임 지회장은 2022년 3월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물과 소금만으로 버틴 싸움이었다. 단식 투쟁에도 사측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보다 못한 시민단체들이 ‘파리바게뜨 노동자 힘내라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을 조직하고 1인 시위에 나섰다. 공동행동의 대표는 ‘거리의 변호사’라 불리던 권영국이었다.

“세상이 거꾸로 됐다” 물구나무 시위

‘매장에서 직접 구운 빵’은 파리바게뜨가 베이커리 업계 1위로 자리잡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파리바게뜨를 운영하는 SPC그룹의 파리크라상(본사)이 생지를 가맹점에 공급하고, 제빵기사가 매장에서 직접 반죽을 구워내는 방식은 제빵 기술이 없는 이들도 점주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구조 덕분에 파리바게뜨는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이 제빵기사 파견 시스템은 ‘불법 파견’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제빵기사들은 본사 퇴직 임원들이 세운 용역업체 소속으로, 실질적인 지시는 본사인 파리크라상으로부터 받았다. 파리크라상과 용역업체, 가맹점주 사이에서 제빵기사들은 저임금과 과도한 노동에 시달렸다. 2017년, 제빵기사였던 임종린 씨는 정의당(현 민주노동당)의 지원을 받아 불법 파견 문제를 공론화했고,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산하에 파리바게뜨 지회를 설립했다. 이는 업계 내 고용구조의 문제를 드러내는 전환점이 됐다.

파리크라상은 고용노동부로부터 직접고용 등 시정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아 162억원의 과태료 처분을 받게 됐다. 이에 파리크라상과 정의당, 더불어민주당, 가맹점주협의회, 시민단체, 파리바게뜨 지회, 당시 새로 설립된 한국노총 노조까지 7자가 모여 ‘사회적 합의’를 도출했다. 파리크라상은 제빵기사를 본사에서 직접 고용하는 대신, 자회사인 피비파트너즈를 통해 간접 고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대신 3년 안에 임금을 본사 수준으로 맞추겠다고 약속했고, 이 조건으로 과태료 처분을 면제받았다. 2018년의 일이다.

하지만 이 합의는 끝내 이행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사측의 ‘노조 와해’ 정황까지 드러나면서, 제빵기사들이 세운 노조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처지에 내몰렸다. 이런 상황에서 임종린 지회장의 단식 투쟁은, 그가 꺼낼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제빵기사들의 곁을 지킨 이들이 ‘공동행동’이었다. 공동행동 대표 권영국 변호사는 서울 한남동에 있는 허영인 SPC 회장 자택 앞에서 물구나무를 선 채 1인 시위를 벌였다. 그는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SPC가) 법적 책임을 면하려 한 합의였는데 오히려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있다. 현실을 거꾸로 뒤집고 있어서 몸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임 지회장이 53일간의 단식 투쟁을 마치고 다섯 달이 지난 2022년 10월, SPL 평택공장에서 노동자 박선빈씨가 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2인 1조’ 매뉴얼도 지켜지지 않았고, 기계에는 안전장치인 인터록(Interlock)조차 없었다. 박선빈씨 사고 일주일 전에도 이 공장에서 손 끼임 사고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큰 부상을 입었지만, 사측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SPC가 만든 빵을 사지 않겠다’는 불매운동이 확산했다. 물구나무 시위에도 나오지 않던 허영인 회장이 그제야 나와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권영국은 2022년 만들어진 ‘중대재해전문가네트워크’의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2016년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10대 노동자 김모씨가 전동차에 치여 숨졌을 때는 유족을 대리해 서울시와 진상조사 기구 마련에 합의했다. 2018년 12월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김용균씨가 사망했을 때는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김용균 특조위)’에서 특조위 간사로 활동했다. 당시 SPL 사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측의 안전관리의무 위반 문제를 파헤치고 이를 적극적으로 알렸다. 2022년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주와 경영 책임자에게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부여하고, 이를 위반하여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한 경우 처벌토록 한다. SPL 대표이사는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으로 기소됐지만 지난 2월 21일 1심 판결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으로 실형을 면했다.

파리바게뜨 지회 등 노동자들의 싸움은 현재진행형이다. 허 회장을 포함한 SPC 그룹 전·현직 임직원 19명은 ‘노조 파괴’(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위반 등) 혐의로 1년 넘게 재판을 받고 있다. 허 회장은 지난해 4월 구속 기소됐지만 5개월 뒤 1억원의 보석금을 내고 나왔다.

SPC그룹의 각종 사업장에서는 사망 사고 등 중대재해가 끊이지 않는다. 지난 5월 19일, SPC삼립 시화공장에서는 50대 노동자가 작업 중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로 나선 권영국은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몇 명이나 더 죽어야, 얼마나 유가족이 많아져야 저 죽음의 공장이 바뀔까. 더는 봐줄 수 없다. 고용노동부는 이 사건의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여부를 철저히 수사하라. 사업주 책임을 명백히 밝혀내고, 법에 따라 엄중하게 처벌하라”고 썼다.

권영국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돕겠다”고도 했다. 임종린 지회장은 그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 “시민단체에 이름만 올려놓고 활동 안 하는 명망가도 많은데 권영국은 달랐어요. 어떻게 돈도 안 받고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전국을 다니며 토론회를 하고 집요하게 매달렸죠. 우리끼리 ‘저분 생계는 어쩌지?’ 걱정할 정도였다니까요.” 그는 이번 대선에서 권영국 지지를 선언했다.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내주는 정당이 어디일까. 우리 곁에서 함께 싸운 이가 누구인지 생각하면 당연할 일 아닌가요?”

“반성하는 정치인을 본 적이 있었나?”

권영국은 이주노동자들이 2005년 노조 설립을 추진할 때도 함께 있었다. 노동지청은 “불법 체류자”들의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며 설립 신고를 반려했고, 이에 이주노조는 실립 신고 반려를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는데, 당시 이주노조의 대리인이 권영국이었다. 경기 남양주 마석가구공단에서 일하다 2000년대 초 이주노조 활동가가 된 섹 알 마문은 “당시 노조는 돈이 없어서 변호사 선임이 어려웠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드는 것에 대해 적극 나선 변호사도 없었다. 그때 권영국 변호사가 사건을 맡았다”고 말했다.

대법원이 이주노조의 손을 들어주는 결정을 내린 게 2015년 6월이었다. 설립 신고 반려부터 승소까지 10년이 걸렸다. 그 사이 이주노조 임원들은 당국의 ‘표적 단속’에 붙잡혀 본국으로 추방됐다. 섹 알 마문이 말했다. “그 10년이 우리에겐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간부를 다 잡아서 보내버리니까 이끌어갈 사람도 없고, 동력은 떨어지고···. 간부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이주노동자들도 노조에 가입하지 않으려 했죠.”

정부 단속에 붙잡히지 않고 노조를 이끌 만할 사람이 필요했다. 민주노총에 고용돼 활동가로 일하던 네팔 출신 우다야 라이가 위원장으로, 한국인과 결혼하고 귀화한 방글라데시 출신 섹 알 마문이 부위원장이 됐다. 섹 알 마문은 대법원 앞에서 ‘승소 판결 환영’ 현수막을 펴고 기자회견을 했던 ‘2015년 6월 25일’을 잊지 못한다. 10년간의 싸움이 끝난 이날, 권영국은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직 임원들이 추방될 때마다 집행정지 신청, 강제출국처분취소소송 등을 대리했는데 계속 패소했습니다. 그 끝이 오늘이라 생각합니다. 초대 위원장 아노아르 후세인, 2대 까지만 위원장, 라쥬 부위원장, 마숨 사무국장, 3대 토르너 위원장, 소부르 부위원장, 4대 미셸 카투이라 위원장···. 이런 분들의 끊임없는 희생 덕분에 오늘 다행스러운 판결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대법원 결정에도 노동지청은 ‘노조 설립 필증’을 내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이주노조가 규약에 명시한 ‘고용허가제 반대’와 ‘이주노동자 합법화 쟁취’가 노조법상 허용되지 않는 정치운동으로 보인다며 보완할 것을 요구했다. 2004년 도입된 고용허가제는 비전문취업(E-9) 비자를 받고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에게 사업장 변경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노동 조건이 열악하고 임금을 받지 못해도 사업주의 허락 없이는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이주노조는 규약에서 ‘고용허가제 반대’ 등의 내용을 삭제하고 노조 설립 필증을 받았다. 권영국은 지난 4월 ‘한겨레21’ 기고에서 “노조 합법화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이주노동자들의 삶은 전혀 개선되지 못했다. 고용허가제는 ‘현대판 노예제’로 여전히 악명을 떨치고 있다”며 “아리셀 참사, 몽골이주청년 강태완, 유령처럼 죽어가는 이주노동자들을 떠올린다. 그때 내가 타협하지 말았어야 할 사항이었나 싶어 아프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에 대해 섹 알 마문 이주노조 부위원장은 “우리 사회가 반성하는 정치인을 본 적이 있었나? 내겐 처음이었다”라며 “하지만 절대 권영국의 잘못이 아니었다. 당시 노조 설립이 안 되면 존립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용허가제 반대와 이주노동자 합법화는 앞으로 우리가 싸우면서 쟁취해야 할 것들”이라고 말했다.

이주노조에는 여전히 과제가 많다. 농업 분야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상 휴게·휴일·근로시간 등의 적용 대상이 아니고, 냉난방조차 안 되는 불법 컨테이너 숙소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다. 중대재해처벌법은 ‘5인 이상 사업장’에만 적용된다. 이에 편법으로 사업장을 5인 미만으로 쪼개는 기업도 많다. 이주노동자 대부분은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한다.

투표권이 있는 섹 알 마문 부위원장은 이번 대선에서 ‘5번’을 찍겠다고 했다. “거대 양당은 저희 삶을 하나도 바꿔주지 못할 거예요. 제 삶을 위해서 권영국을 지지합니다. 한국사회에 우리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투표로 보여주고 무시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권영국이 경주로 간 이유

권영국도 처음부터 변호사는 아니었다. 1985년 병역 특례로 방산업체인 풍산금속에 취직했다가 노동자 대투쟁 시기에 동료들과 노조 결성에 나섰다. 권영국이 있던 풍산금속 경주 안강공장에서 집속탄을 개발하던 부서의 반장이 폭발 사고로 사망했고, 제대로된 사과 조차 받지 못한 유가족들이 ‘풍산금속 안강공장은 치외법권 지대인가’라는 유인물을 뿌렸다. 권영국과 동료 3명은 유가족들의 유인물을 읍내 담벼락에 붙이다가 ‘회사 명예훼손과 군사기밀누설’로 1988년 8월 해고됐다.

집속탄 개발 부서에 있던 이종대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그때 집속탄을 시험하던 반장이 굉장히 두려워했던 기억이 나요. 안전 장치 없는 집속탄을 손으로 들어 시험 기계 안에 넣어야 하는데 손이 조금만 흔들리면 사고가 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결국 폭발 사고가 난 거죠. 회사에서는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어요. 방산업체다보니 ‘국가 기밀’이라며 못하게 하는 일이 많았죠. 심지어 화장실 갈 때도 네모난 막대기를 목에 걸어야 했어요. 우린 그걸 ‘똥 카드’라고 불렀는데, 똥 카드 없으면 화장실도 못갔죠. 그런 회사에서 폭발사고를 알리는 벽보를 외부에 붙인다는 건 당시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이종대씨 등 노조 조합원들과 권영국 등 해고 노동자들은 서울 충무로에 있는 풍산금속 본사까지 가서 9일간의 점거 농성에 들어갔고 1989년 11월 권영국 등의 해고는 취소됐다. 하지만 1990년 1월 전국에서 소집된 경찰들이 안강공장 안으로 들이닥쳐 노조 집행부를 구속했다. 이후 권영국은 ‘업무방해죄·노동쟁의조정법 위반’ ‘병역법위반’ 등으로 두 차례 옥살이를 했고, 풍산금속에서는 또다시 해고됐다. 총 3년 6개월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한 권영국은 복직 투쟁을 벌였지만, 당시에는 노조가 사실상 와해된 상황이었다. 권영국은 이후 사법고시 3년을 공부해 변호사가 됐다.

구속을 면한 이종대씨는 노조 재건 활동을 벌이다가 해고됐다. 그는 울산항만에서 운송 기사를 하다 그만두고 화장품 대리점을 차렸다. 지금은 매일 저녁 8시부터 새벽 4시까지 대리운전을 한다. 지난 5월 25일 울산에서 만난 이종대씨는 “당시 해고된 이들 중 벌써 7명이 세상을 떠났다. 젊은 날에 복직이 됐으면 좋았을 텐데 이미 정년이 훌쩍 지난 나이가 됐다”고 말했다.

한편, 해고노동자에서 변호사가 된 권영국은 ‘민주노총 법률원 초대 원장(2002~2005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위원장(2008~2014년)’으로 활동했다. 민변 노동위원장 2년차였던 2009년은 끔찍한 시절이었다. 그해 1월 용산 4구역 재개발에 반대하며 망루로 올라간 철거민을 경찰이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망루에 큰 불이 났다. 이에 철거민 등 4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사망했다. 같은 해 8월 경찰은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공장 문을 닫고 77일간 옥쇄 파업을 벌이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을 같은 방식으로 강경 진압했다.

두 사건에서 권영국은 모두 변호사로 나섰다. 용산 참사 당시 남편 이상림씨를 잃고, 아들 이충연씨의 옥바라지까지 해야 했던 전재숙씨는 “모든 걸 잃은 상황에서, 그 긴 싸움 동안에 곁에 있던 이가 권영국 변호사였다”고 말했다. “대법원 앞에서 시위할 때였어요. 경찰이 권영국 변호사를 잡아가는데 내가 그의 바지를 붙잡고 늘어졌던 기억이 생생해요. 권영국 변호사마저 잡혀가면 안 되니까···. 그 사람이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더니 금방 나오더라고요. 벌써 16년이 지났는데 우릴 잊지 않았어요. 지난번 남편 기일 때도 와주었죠.”

쌍용차 노조의 김득중 지부장은 ‘권영국’이라는 이름을 77일간의 옥쇄 파업 중에 들었다. 2009년 6월 권영국은 쌍용차 평택공장 앞에서 체포된 쌍용차 조합원들에 대한 변호인 접견권을 요구하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김득중 지부장이 말했다. “옥쇄 투쟁 중이던 평택공장을 방문하러 온 변호사 한 명이 경찰에 붙잡혔다는 얘기가 돌았어요. 다들 ‘우리 돕다가 체포된 변호사가 있다고?’라며 놀라워했죠.”

변호사였던 권영국이 정치로 나서기로 한 건 2014년 대법원에서 ‘쌍용차의 해고가 유효하다’는 판결이 나면서였다. 해고노동자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그 옆에서 권영국은 침통해 했다. 권영국은 책 <거리에 핀 정의>에서 “그때 현장 운동만으로 제도를 바꿀 수 없음을 절감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이후 노노사정 4자 합의에 따라 2020년 5월 전원 복직했다. 복직한 이후에도 노조는 경찰과 사측의 손해배상청구 등으로 한동안 고통을 받았다. 노조 활동으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을 제한하는 내용의 ‘노란봉투법’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거부권으로 무산된 상태다.

용산 참사 당시 강경 진압의 책임이 있던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2016년 총선에서 경북 경주에 출마했을 때 권영국도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당시 김득중, 전재숙, 이종대씨가 경주를 찾아가 그의 유세를 도왔다. 권영국은 그 총선에서 낙선하고도 또 김석기를 막아야 한다며 다음 총선에 나섰다. 이종대씨는 “권영국은 참 바보 같은 사람이다. 김석기를 막겠다며 보수 성향의 경주에 출마하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일인데···. 그 후에는 아예 경주에 가서 살기까지 했다. 참 진실하고 끈질긴 사람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나중에’ 말고 ‘지금 당장’”

‘거리의 변호사’는 이제 민주노동당(옛 정의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다. 김득중 쌍용차 지부장은 “권영국 후보는 당선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에게 표를 주는 것이 ‘미래를 위한 밀알’이 된다고 믿는다. 밀알을 키워내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평생 함께했던 노동자나 철거민 외에도 전세사기 피해자, 성소수자, 장애인 단체들도 권영국 후보 지지선언에 나섰다. 차별금지법,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 장애인 이동권 보호 및 탈시설 정책 등에 나섰던 정의당이 뿌린 씨앗이기도 하다. 성소수자인 소성욱씨는 “지금 대선후보 중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말하는 후보는 권영국뿐”이라며 “다들 ‘나중에’를 말하는데 언제까지 우리의 존재를 지우고 ‘나중’만 외칠 건가. ‘지금’ 하겠다는 후보를 지지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안상미 인천미추홀구전세사기피해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전세사기피해 특별법(전세사기피해자지원및주거안정에관한특별법) 제정에 정의당이 큰 역할을 해왔다”며 “전세사기 피해자 구제는 양당 구조인 지금의 정치구조에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전세사기 문제를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로 보고 이를 방지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정당은 정의당 뿐이었다”고 말했다.

안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 대선에서 권영국 후보에게 주는 표는 사표가 아니에요. 우리를 살리는 표죠. 권 후보가 대선후보 토론에 나설 수 있던 것도 진보정당이 지난 총선에서 3% 이상의 표를 받았기 때문 아닌가요. 대선이라는 큰 장에서 우리 같은 약자들의 말이 권영국의 입을 통해 한 번이라도 더 나가고, 토론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에 이와 관련해 약속을 받아내는 모습을 다들 봤잖아요. 그것으로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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