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커닝과 기술 도핑

2025-11-18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수많은 사건을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공정이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될 사회적 역린이라는 건 모두 잘 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정은 사회를 지탱하는 토대다. 그리고 그 전제 조건은 신뢰다. 노력에 정당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성취가 땀과 헌신의 결과라는 신뢰가 무너질 때 사회는 요동친다. 최근 대학가를 휩쓴 ‘인공지능(AI) 커닝’ 논란은 이런 공정의 근간을 흔든 사건이었다. 학생들이 챗GPT 등 생성형 AI를 활용해 과제를 하고 시험 답안을 찾는 건 이미 만연한 일이라고 한다. 얼마 전 만난 한 대학 영문학과 교수도 “교수가 챗GPT로 시험 문제를 내고 학생도 챗GPT로 답안을 작성하면 도대체 인간은 뭘 하고 왜 필요할까”라고 푸념했다. 그의 푸념은 인간의 노력과 성취라는 가치 자체가 무의미, 무가치해질지 모른다는 위협에 따른 것일 테다. 학생 성적이 더는 지식 습득의 척도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이를 측정하는 게, 더 나아가 이를 근거로 이후 펼쳐질 모든 일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스포츠계 성찰 기회 된 기술 도핑

AI 커닝 논란 속 위기의 대학교육

인간 재정의와 본질적 혁신 계기

교육계가 맞닥뜨린 AI 커닝 논란, 더 나아가 인류가 마주한 AI 충격은 한때 스포츠계가 겪었고 요즘도 간간이 불거지는 ‘기술 도핑’ 논란과 꽤 닮았다. 운동선수의 능력이나 노력이 아니라 장비나 기술의 차이로 승패가 갈리면서 세계 스포츠계를 강타했던 일련의 사건이 기술 도핑 논란이다. 스포츠계가 겪은 기술 도핑 논란과 교훈은 최근 AI 커닝 논란 등을 겪는 교육계 등 사회 전반에 시사점을 준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전후로 세계 수영계는 전신 수영복 논란으로 몸살을 앓았다. 한 업체가 내놓은 유체역학적 소재와 디자인의 수영복은 부력을 높이고 물의 저항을 최소화했다. 이 수영복을 입은 선수들은 불과 1년여 동안 세계신기록 130여 개를 쏟아냈다. 피땀 흘리는 선수의 노력이 아니라, 기술의 차이로 또 기술을 도입할 수 있는 선수나 국가의 경제력 차이로 메달 색깔 등 결과가 달라졌다. 급기야 국제수영연맹(WA)은 공정성 훼손을 이유로 2010년 해당 소재와 디자인을 금지했다. 육상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한 업체가 내놓은 육상화는 특수 제작된 탄소 섬유판이 신발 바닥에 내장돼 에너지 효율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몇 초 차로 순위가 갈리는 중장거리 종목에서 이 기술이 주는 이익은 압도적으로 컸다. 이 육상화를 신은 선수를 향해 “돈으로 승리를 샀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세계육상연맹(IAAF)은 결국 밑창 두께 등에 제한을 두는 규정을 마련했다. 기술이 선수 간 진정한 차이를 판별하는 대신 자본력과 연구개발 능력의 격차를 드러내는 도구로 전락한 데 따른 조처였다.

스포츠계 기술 도핑 논란이 AI 커닝 논란에 던지는 화두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인간 역할의 재정의가 필요하다는 거다. 전신 수영복 유행 당시 “최첨단 수영복을 입은 선수가 가장 뛰어난 선수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됐다. 이를 바꾸면 “AI를 가장 잘 다루는 학생이 가장 유능한 학생인가”쯤이 될 거다. 스포츠계가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피땀 어린 노력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제한을 둔 것처럼, 교육계도 인간의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지켜낼 경계를 찾아야 한다. 세계적 AI 경쟁에서 뒤처지거나 지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문제에 눈감으면 안 된다. 다음으로 사후 규제는 늘 뒤질 수밖에 없다.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수영복이나 육상화 등에 대한 규제는 기술 발전을 뒤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대학 학칙이나 시험 규정 변경 역시 AI의 발전이 가져올 상황에 맞춰 고칠 수밖에 없다. 기술은 언제나 규제에 앞서 달린다. 따라서 AI 커닝 논란의 해법이 단순히 이를 막는 데 맞춰진다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이번 논란이 과거를 답습하거나 본질적 혁신과 거리가 멀었던 대학 교육을 바꾸는 기회일 수도 있다.

AI 커닝 논란은 다양한 분야의 기술 발전이 불러올 더 많은 ‘논란’의 서곡일지 모른다. 2010년대 초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장애인 육상선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의 올림픽과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출전을 둘러싸고 ‘의족 스프린터’ 논란이 있었다. 무릎 아랫부분을 절단한 선수의 탄소섬유 의족이 단순한 보조기구인지 아니면 기록을 급격히 단축하는 기술 도핑인지를 둘러싼 논란이었다. 요즘의 로보틱스 기술 발전 속도와 웨어러블 로봇의 적용 추세를 보면 조만간 사회의 어느 분야에선가는 유사한 논란이 벌어질 거다. 그런 점에서 이번 AI 커닝 논란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앞으로 마주할 세상의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나저나 AI나 로봇이 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기는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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