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외교 프로토콜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지 않나. 우리 역시 프로토콜과 달리 움직여야 했던 것.”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의 이례적 한·미 정상회담 동행에 대해 그와 가까운 한 여권 관계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강 실장의 동행 사실이 지난 22일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의 기자간담회에서 처음 알려지자 정치권에선 숱한 추측이 나돌았다. 통상 대통령 해외 순방 때 비서실장은 대통령실에 남아 국내 상황을 총괄했기 때문이다.
강 실장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 더 설득할 수 있다면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남긴 채 24일 이 대통령보다 약 다섯 시간 가량 먼저 미국으로 떠났다.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인지에 대해선 묵묵부답이었다.

미스터리였던 강 실장의 방미 목적은 지난 25일(현지시각) 한·미 정상회담이 마친 뒤에야 그의 입을 통해 베일이 벗겨졌다. 백악관 첫 여성 비서실장인 수지 와일스와의 핫라인 구축이 강 실장의 목표였다. 와일스는 트럼프가 ‘얼음 아가씨(ice maiden)’라고 부를 정도로 냉철한 조언을 하면서도, 그의 온전한 신임을 얻고 있는 최측근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약 2주간의 조율을 거쳐 지난 25일(현지시각) 한·미 정상회담에 앞선 오전 10시 40분부터 40분간 비공개로 이뤄졌다
양국 비서실장이 따로 만나 핫라인을 구축하는 건 국제 정치 문법을 뛰어넘은 일이다. 비서실장은 정무·인사 등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역할이지, 외교·안보·통상 영역에서 직접 교섭 무대에 오르진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엔 ‘위성락 국가안보실장-마크 루비오 미 국가안보보좌관 겸 국무장관’,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같은 필연적인 국가 간 카운터파트(counterpart·상대)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익명을 원한 정부 관계자는 “이 대통령을 지근 거리에서 보좌하며 이 대통령이 매우 노심초사하고 있단 것을 강 실장이 내내 피부로 느꼈을 것”이라며 “트럼프 행정부의 변칙성이 우리 정부의 위기감을 높이는 상황에서 트럼프의 속내를 파악할 라인이 하나라도 더 필요하다는 판단이 강 실장 동행에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와일스가 만남에 응한 것 역시 매우 파격적인 일로 꼽혔다. 지난해 11월 6일 당선 확정 후 축하 연단에 오른 트럼프는 “수지는 뒤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뒤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며 와일스의 이름을 7번이나 부르며 발언을 요청했지만 끝내 고사할 정도로 와일스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강 실장의 ▶정상회담 당일 브리핑 ▶28일 기자간담회 ▶29일 유튜브 ‘김어준의 뉴스공장’ 인터뷰 발언을 종합해 와일스와의 면담 막전막후를 재구성했다.
# 1.
지난달 31일 한·미 관세 협상 타결 직후 강 실장은 한·미 정상 회담에 앞서 정무라인 간 소통 채널을 마련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외교·안보·통상 분야 카운터파트너들 간에 협상이 제각각 진행되면서 “칸막이들이 처져 있어 답답하다. 소위 정무 라인이 종합적으로 보고 그림을 그려봐야겠다”는 문제의식이 생긴 것이다. 강 실장은 김민석 국무총리와 만나 “총리께서 JD 밴스 미(美) 부통령을 뚫어라. 제가 와일스 비서실장은 뚫어보겠다”고 타깃을 정했다. 이런 필요성을 이 대통령에게 건의해 승낙을 받았다.

정부 외교·안보 라인이 주선을 위해 물밑에서 움직였다. 결국 와일스와 만남이 한·미 회담 일주일 전 쯤 확정됐다. 당시 시점은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 명의의 ‘최후통첩’이 한국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문서에는 관세협상에서 합의한 3500억 달러(약 487조원) 투자의 세부 항목을 미국 요구대로 동의하란 내용이 담겼고, 한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한·미 정상회담은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도 포함됐다. 이게 트럼프의 뜻인지, 실무자의 블러핑(bluffing·허세)인지를 알 수 없어 혼란이 고조된 상황이었다.
#2.
25일 와일스와의 면담을 80분 앞두고 트럼프는 SNS에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숙청이나 혁명처럼 보인다”는 글을 올렸다. 이 대통령은 의외로 침착했지만 참모들의 현장 분위기는 비상 그 자체였다.
강 실장은 와일스와의 면담에 착석하자마자 이 SNS 글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강 실장은 “한국에서 지금 일어나는 특검의 압수 수색은 이재명 대통령이나 행정부가 주도한 일이 아니고 국회가 결정하고 특검 제도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와일스는 “알았다” 정도로 반응했다.
와일스는 이내 협상 관련 얘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와일스의 아버지가 한국군 참전 용사였던 점을 파악해 간 강 실장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당신 아버지가 피로 지킨 나라인데 이제는 당신이 지켜달라”고 자락을 깔았다. 선거 컨설턴트 출신인 와일스가 표심에 민감할 것을 고려해 “미국에 사는 한국계 미국인들은 200만명”이란 점도 부각했다.
면담 말미 강 실장은 트럼프의 SNS 메시지 얘기를 다시 꺼내며 “한국 상황에 대해 대통령에게 꼭 좀 보고를 해달라”고 당부했다. 비로소 와일스가 “보고하겠다”고 명확한 답을 줬다. 강 실장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내내 미소를 유지했지만, 와일스는 단 한차례도 웃지 않않다. 면담은 40분간 이어졌다.
#3.
두 시간 뒤 정상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트럼프는 이 자리에서 “(숙청, 혁명 등 자신이 들은 내용이) 오해라고 확신한다”며 자신의 SNS 글을 거둬들였다. 강 실장은 회담이 끝날 때 와일스에게 “It was a good conversation”(좋은 대화였다)이라고 영어로 말을 건넸다. 그제야 와일스는 처음 미소를 지었다.

강 실장은 이 대통령보다 하루 앞선 지난 27일 오후 5시 40분 KE094편으로 귀국했다. 출국 땐 공항이 취재진으로 붐볐지만 귀국길은 비공개였다. 출국 전에 비해 피로가 누적된 모습이었지만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공항에서 만난 그는 “비서실장 취임 이전보다 체중이 7㎏이상 빠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