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론직설] “햇볕정책으로 北 비핵화·합의 통일, 처음부터 환상에 불과”

2025-09-01

미중 전략 경쟁 등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주도로 구축된 국제 자유무역과 안보 질서가 급변하고 있다. 한국의 고도성장과 민주화를 이끌었던 기본 축이 흔들리고 있는데도 진영 대결 등으로 인해 위기 극복을 위한 우리 내부의 에너지가 약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구소련) 출신으로 북한에서 수학한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양학부 교수가 본 한국의 현실을 들어봤다. 란코프 교수는 1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진보 진영에 대해 “북한에 대한 착각이 많다”며 “남북 교류 등 햇볕 정책으로 북한의 비핵화나 합의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환상에 불과했다”고 꼬집었다. 북한 엘리트들 입장에서 볼 때 남북 간 문화·인적 교류는 북한 인민들이 남한의 실상을 알 기회를 제공해 체제 유지에 심각한 역효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보수 진영에 대해서도 그는 “미국은 옛날만큼 믿을 만한 동맹국이 아닌데도 핵우산 등 안보를 비롯해 미국에 대한 의존도와 신뢰도가 지나치게 높다”고 지적했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기여도가 가장 높은 역대 대통령은 누구라고 보나.

△단연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그는 자원이 거의 없고 부지런한 노동력이 많은 한국의 특징에 맞는 경제 전략을 개발해 20년 동안 지휘했다. 박정희가 한국 경제 기적의 아버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음은 한국 민주화에 기여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아시아에서 한국과 같은 민주주의국가는 그리 많지 않다. 이들 두 사람은 서로 대립했지만 국민들이 잘사는 민족국가 대한민국을 건설한다는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 박 전 대통령은 독재와 인권 탄압을 했다.

△민주주의는 1960년대 한국처럼 저소득 국가의 경제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좋든 싫든 한국의 경제성장은 개발독재에 기반해 이뤄진 것이다. 경제성장의 첫 단계에서는 이런저런 내부 갈등을 진압할 수 있어야 한다. 중국이나 대만·베트남 등에서도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고도성장을 이룬 나라들을 보면 대부분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5000~2만 달러 정도인 중진국이 된 후에야 민주화를 시작했다.

-한국이 경제성장에 이어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 문화이다. 벼농사 국가들은 노동에 대한 열망, 교육열, 규율을 강조하는 문화적 특징을 갖고 있다. 둘째, 매우 성공적인 경제 노선이다. 마지막은 외부 환경이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냉전 시대를 맞아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한국을 공산주의 세력 저지를 위한 기지로 삼아 안보·경제 등 직간접적인 지원과 원조를 제공했다.

-지금 사회 주류가 된 586은 1980년대 대학생 시절 한국의 현실에 부정적이었다.

△586은 자본주의국가에서 제일 인상적인 경제 기적 속에서 자라났지만 다른 나라를 살펴볼 기회가 없어 이런 사실을 보지 못했다고 본다. 빈부 격차 등 자본주의의 부작용에 집중했기 때문에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의 학생 운동권에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가 진보였고 국가사회주의는 반동적 경제 체제였다. 이들은 소련이 자본주의 체제로 넘어가면 미국·독일처럼 잘사는 나라가 되고 열심히 일하면 누구든지 성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물론 실망도 많았지만 오늘날 러시아는 그 어느 때보다 잘살고 있다.

-한국의 586이 기득권 세력이 됐다는 비판 또한 나온다.

△사상의 색깔과 무관하게 세계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반체제 운동의 매우 대표적인 경향이다. 한국의 좌파 세력은 권력을 장악한 후 과거의 혁명 정신이 약해졌다. 부정부패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도 늘어났다고 본다. 흥미롭게도 지금의 한국 젊은이들, 특히 젊은 남성들이 볼 때 진보 세력은 정치적·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기득권 세력이 돼버렸다. 1980년대 그들의 부모들이 젊었을 때 보수 세력을 보던 시각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역사는 어느 정도 진자(振子)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은 보수와 진보 간, 또는 우파와 좌파 간의 갈등이 심각하다.

△수많은 경우 객관적 현상이 아니라 심리적 현상에 가깝다고 본다. 대립의 본질을 보면 주변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얘기다. 1990년대 말 진보 진영은 재벌 해체, 사회복지 확대 등을 외쳤다. 지금은 좌우 대립의 핵심인 경제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많이 줄었다. 대신 친일 등 역사 문제 얘기가 많다. 가장 차이가 큰 분야는 북한 문제 등 대외 정책이다.

-북한은 이재명 정부의 대화 손짓에 대해 무시로 일관하고 있다.

△과거 북한이 한국과의 회담이나 교류 협력을 허용한 것은 직접적 원조나 무역으로 위장한 간접적 원조를 받고 미국과의 협상 때 한국이라는 중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북한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나라가 됐다. 이재명 정부가 대북 지원을 하고 싶어도 국제 제재 때문에 거의 불가능하다. 한국이라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고장 나 있는 대신 중국과 러시아에서 많은 지원을 받고 있다.

-앞으로 남북 교류 협력이 어렵다는 얘기인가.

△북한과의 평화 공존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북한과의 교류, 대북 지원이다. 남북 갈등을 줄일 수 있고 북한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하지만 북미 타협을 통한 대북 제재 완화 없이는 남북 관계 개선도 불가능하다. 문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과 회담을 할 때 한국의 이익은 신경 쓰지 않고 자국 이익만을 생각할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리 없는데.

△북한은 문재인·윤석열 정부 등을 가리지 않고 핵과 미사일을 열심히 개발했다. 한국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을 대답이겠지만 북한의 핵 포기는 희망조차 없고 북핵 동결이나 군축이 현실적인 목표라고 본다. 북한에 이런저런 양보를 하더라도 북한이 핵 동결, 군축 약속을 지키지 않고 비밀리에 핵무기를 유지하거나 핵 개발을 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래도 핵 고도화 속도는 많이 둔화될 것이다. 안타깝지만 지금 한국은 북한의 비핵화와 핵 개발 사이가 아니라 빠른 북핵 고도화와 빠르지 않은 북핵 고도화 사이의 선택에 직면해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적대적 두 국가론’을 통해 선대의 ‘조국 통일 유훈’마저 거부하고 있다.

△양측이 수십 년간 반복해온 합의 통일은 처음부터 듣기 좋은 환상이나 ‘프로파간다(정치 선전)’에 불과했다. 세계 역사를 보면 남북한처럼 경제 수준과 정치 구조가 다른 국가가 외교적 타협을 통해 통일한 전례가 없다. 특히 북한 엘리트 계층은 통일에 대해 자신들의 집단 자살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통일 한국에서 자신들이 성공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과거 인권침해 등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 외에 중국 때문에 독일식 통일, 즉 흡수통일 가능성도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북한을 가치가 높은 전략적인 완충지대로 보고 있기 때문에 남북 통일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김 위원장의 권력이 공고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국제정치적으로 10년 전 매우 심각했던 고립 국면에서 탈출했다. 북한 엘리트 계층은 체제가 흔들리지 않아야 자신들의 권력과 특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김정은에게 도전할 생각조차 없다. 앞으로 10~15년 동안 김정은 건강에 큰 문제가 없다면 4대 세습까지 가능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대를 포함한 ‘한미 동맹 현대화’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이른바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정책을 실시해왔던 한국 입장에서 보면 매우 어려운 전략적 도전이다. 앞으로 한국은 미중 대립 구도에 흡수될 수 있다. 과거 150년간의 한국 역사가 보여주듯이 한국은 주로 강대국 간의 충돌에 휩쓸릴 때 위기를 겪었다. 청일전쟁·러일전쟁·한국전쟁 등이 그랬다. 그러나 한국이 대중 억제 정책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보호와 안전 보장에 의지하기가 많이 어려워질 것이다.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한국이 핵무장을 포함해 자신의 독자적인 핵 억제 수단을 개발하는 것 외에는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미국이 한국의 독자적인 핵무장을 받아들일 리 없는데.

△미국 설득은 쉽지 않을 것이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가 핵 개발을 시도한 후 한국은 핵 잠재력 확충 측면에서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우리는 냉전 후 30년 동안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는 평화의 시대, 안전의 시대를 살아왔다. 하지만 세계는 다시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위기에 이어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한국군이 재래식 무기만으로는 핵무기, 특히 전술핵으로 무장한 인민군을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갈수록 혼란스러워지는 세계에서 핵무기만큼 나라를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본다. 최소한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을 통해 핵 잠재력만이라도 확충해야 한다.

He is…

1963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옛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레닌그라드국립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한국 역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조교수를 역임했다. 1984~1985년 북한 김일성종합대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했다. 호주국립대 교수를 거쳐 2004년부터 국민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대북 정책을 논의한 민간 전문가 다섯 명 중 한 사람으로 2017년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에 의해 ‘올해의 사상가 50인’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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