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브르 소장의 걸작 ‘밀로의 비너스’가 출토된 섬, 멜로스는 그리스 헬레니즘 예술의 절정을 상징한다. 그러나 기원전 416년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의 펠로폰네소스전쟁의 한복판에서, 이 섬은 제국들의 오만과 잔혹함을 드러낸 비극의 현장이 됐다.
투키디데스가 전한 ‘멜로스 대화’에 의하면 아테네는 중립을 지키려던 멜로스인들에게 항복을 요구했고, 멜로스는 신의 정의와 자유의 가치를 호소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냉혹했다. “강자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약자는 결과를 감당할 수밖에 없다.” 협상은 결렬됐고, 포위전 끝에 멜로스는 흔적조차 남지 않을 만큼 유린당했다.

약소국이 강대국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수 있느냐는 질문은 2500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이재명 대통령은 워싱턴 무대에서 거친 보호무역 공세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침착한 전략으로 트럼프의 어조를 누그러뜨리며, 한국이 더 이상 수동적 약자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한편 김정은은 중국 베이징 군사 퍼레이드에서 시진핑과 푸틴 옆에 설 준비를 하고 있다.
멜로스를 초토화시킨 아테네는 곧 자신의 파멸을 재촉했다. 승리에 도취한 그들은 불과 2년 만에 시칠리아 원정에서 참혹한 패배를 맞았고, 멜로스의 운명을 거부하는 도시들이 사방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군사적 우월감과 확장 욕망이 불러온 휘브리스(오만)가 제국의 몰락을 앞당긴 것이다. 오늘의 미국도 다르지 않다. 동맹국에 관세와 부담을 지우면서 동시에 안보의 충성을 요구한다. 한국은 이 모순의 최전선에 서 있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면서도 미국의 보호무역과 안보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한국은 더 이상 멜로스처럼 무력한 섬이 아니다. 제국의 휘브리스를 경계하며, 냉철한 현실 인식과 주체적 전략으로 대응하며 스스로의 무대를 만들어 가야 한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