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열린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은 화려한 원색으로 관람객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전시장 앞에는 성조기가 아닌 원주민 부족 깃발이 걸렸다. 체로키족 출신의 작가 제프리 깁슨은 총천연색 기하학적 패턴과 비즈 장식 등으로 선주민 문화를 녹여낸 화려한 작품 속에 인종차별, 동성애 차별 등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미술 올림픽’이라 불리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미국관 대표 작가로 선주민 작가가 단독 선정된 것은 94년 만에 처음이었다.
2024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가’(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며 백인 중심의 미국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대에 미국을 대표하는 얼굴로 선주민 출신의 동성애자 작가가 선정될 확률은 0%에 가깝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 사회적으로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철폐 정책을 밀어붙이는 가운데, 미국을 대표하는 문화기관 역시 표적이 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국립박물관’ 격인 스미스소니언을 표적 삼아 전시·운영 전반에 대한 조사를 벌이며 전방위적 공격을 가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보기에 스미스소니언은 미국의 위대함을 일깨우기 보다 부정적 측면만 부각하는 곳이다. 그는 “스미스소니언은 통제불능”이라며 “우리나라가 얼마나 끔찍한지, 노예제가 얼마나 나쁜 것이었는지, 억눌린 사람들이 얼마나 성취하지 못했는지만 논의된다”고 불평했다.
백악관은 스미스소니언 재단 산하 박물관·미술관 21곳 중 국립미국사박물관, 국립아프리카계미국인역사문화박물관, 국립아메리칸인디언박물관 등 8곳을 검토 대상으로 지목했다. 해당 기관의 “논조, 역사적 프레이밍, 미국적 이상과의 부합”을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학술과 예술의 영역으로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할 박물관과 미술관 전시·운영 전반에 칼을 들이대 정부가 ‘무엇을 보여줄지’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백악관은 10여개의 전시·소장품을 직접 예로 들었다. 인종차별과 이민자·성소수자를 다룬 작품들이 대다수였다. 이중 리고베르토 곤잘레스의 ‘남텍사스 국경 장벽을 넘는 난민들’은 국립초상화미술관 미술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한 작품으로 이민자 가족의 표정에서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순간을 미묘하게 포착했다. 백악관은 이 작품이 담고 있는 다양한 서사와 뉘앙스를 “국경을 불법으로 넘은 행위를 기념하는 예술 작품”이라는 한 마디로 납작하게 눌러 버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전시란 무엇일까? 그는 “성공, 밝음, 미래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와 문화가 특정 인종과 계층의 긍정적인 면으로만 채워진다면 그것은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을 뿐더러 미국 역사와 문화가 다양한 갈등을 극복하면서 이룬 성취와 힘을 잃게 만들 것이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할 능력이 없어서 그런 이야기를 희석하려는 시도는 미국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과 정반대다. 전시물을 더 즐겁고 덜 불편하게 만든다면 러시아·중국·북한 등 역사가 독재자의 동화가 되어 외국에서는 아무도 믿지 않는 나라들과 비슷해질 것이다.” 작가 맷 바이는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이같이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스미스소니언이 미국의 위대한 이야기를 보여주길 바란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일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홍보물로 가득한 곳으로 전락할 공산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