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무장지대(DMZ)에서 버려진 철제 조각은 전시장 한 가운데서 작은 철탑으로 되살아났다. 그 주위를 여러 조각과 조각 모형·드로잉이 둘러싸고 있다. 벽면에는 자개와 광물의 질감이 느껴지는 회화가 걸렸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이불(61)의 최근 30년간 작품활동을 축약하면 그렇다.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오는 4일 개막하는 ‘이불 : 1998년 이후’는 이불이 1990년대 후반부터 현대까지 만든 조각, 대형 설치와 그 모형, 다른 회화 작품 등 150여점을 전시한다. 이불의 명성이 전세계적이라 해외에서는 전시가 활발했지만, 국내에서 여러 시기에 걸친 그의 작품을 한 자리에 볼 기회는 흔치 않았다.

이번 전시를 설명하려면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 ‘이불-시작’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전시는 1987년부터 1990년대 중후반에 이르는, 작품 활동 초기 10여년에 주목했다. 이후 4년여가 흐른 뒤 열리는 이번 전시는 그 이후에 만들어진 작품을 주로 다룬다.
작품 활동 초기 이불은 남성중심사회와 가부장제에 맞서 여성의 신체를 주로 다뤘다. 파격적이기까지 했던 퍼포먼스에 집중하면서 이불은 페미니즘 작가로 통했으며 때로는 여전사로도 불렸다. ‘1998년 이후’의 이불 작품은 그와 결이 조금 다르다. 퍼포먼스를 주로 했던 초기와 달리 조각과 설치 작품이 많고, 최근작으로는 평면 회화도 여럿 있다.
이불은 전시 개막을 앞두고 1일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전시는 지난 전시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람이 성장하면서 관심사가 자신으로부터 주변으로, 세대로 확장된다”며 “저는 스스로를 규정한 적이 없다. 새로운 작품을 선보일 기회가 없어서 저를 부르는 명칭이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불의 작품 중 ‘사이보그’나 ‘아나그램’ 연작이 해외에 소개되기 시작한 때가 1990년대 후반이다. 전시는 이 작품들과,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 출품됐던 노래방 작업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Ⅰ’(1999·2000년 재제작)으로 시작한다. 스테인리스 골조에 폴리카보네이트 패널로, 사람 1명이 겨우 들어가는 크기의 노래방은 20세기 말에 포스트휴먼 담론과 신체의 개념을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사이보그 W6’(2001)는 공상과학영화에 나올 법한 로봇의 팔·다리 등 신체 일부가 빠진 모습을 보여주며, 미래가 기술을 장악한 권력에 결정될 것임을 시사한다.
20세기 말의 창작 활동은 2005년부터 시작된 ‘몽그랑레시(Mon grand recit)’ 연작 등 설치 작품으로 발전한다. 근대의 유토피아적 비전, 모더니즘 건축과 상반된 독일의 표현주의 건축에서부터 그가 경험한 한국 근현대사에 이르는 다양한 관심사가 작품을 만드는 기초가 됐다. 인류 진보에 대한 열망과 현실에 벽에 맞부딪혀 벌어진 실패도 작품의 소재가 됐다. 길이 17m에 이르는 은빛 비행선 작품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2015~2016)이 대표적이다. PET 필름을 사용한 이 작품은 20세기 독일 기술 발전의 상징이었지만 1937년 힌덴부르크 참사로 폭발한 비행선 체펠린을 본따 전시장 진입로에 소음을 내며 떠 있다.

이불이 겪은 격동의 근현대사가 직설적으로 투영된 작품 또한 존재한다. 전시장 한 가운데에 놓인 높이 4m 철탑 ‘오바드 Ⅴ’(2019)는 2018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철거된 감시초소의 폐자재로 만든 것이다. 남북의 평화 무드 덕에 탄생한 작품은 이젠 경색된 남북관계를 연상케 한다. 또 다른 4m 높이의 설치작 ‘벙커(M. 바흐친)’(2007)은 학생운동가 출신 부모 아래서 자라 군사 독재 정권 시절 도망다녀야 했던 경험이 반영됐다. 욕조를 본딴 작품 ‘천지’(2007·2025년 재현)는 1987년 박종철 열사의 사망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불은 이데올로기를 작품의 기반으로 삼던 2005년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다루는 게 아니냐’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그보다 20년이 지난 세계는 양극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불은 “과거는 지나가는 것도, 잊혀지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현재로 되돌아 온다”고 말했다. 그는 “제 작업에서 여전히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작업하는 보람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오히려 ‘너무 지나간 일’이라고 느낀다면 인류에게는 더 좋은 일이 아닐까”라고도 했다.
전시는 내년 1월4일까지. 관람료 1만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