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증언 넘쳐나는데도 거짓말…진실을 영원히 숨길 순 없어”

2025-08-26

헌재 9명 재판관 구성은 미루고

자꾸 다른 탄핵소추안 제출

빠른 심리·선고 가능한 조건

국회가 만들어줬는지 묻고 싶어

탄핵 사유 5개, 세부쟁점 10여가지

쟁점 하나조차 한 기일에 안 끝나

전원일치 위해 긴 ‘숙고의 시간’

111일 만의 선고 결코 늦지 않아

사법의 독립은 ‘견제와 균형’

판결을 정파적으로 보는 건 위험

민주당 제기한 사법개혁 5대 쟁점

대법원, 분명한 입장 밝혀야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건 ‘일상’

흔적 남긴다는 마음으로 책 펴내

김장하 선생에 갚을 빚이 산 같아

비수도권 대학 로스쿨 갈 생각

2025년 4월4일 오전 11시22분. TV 앞에 모인 온 국민의 시선이 한 사람의 입에 집중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22분간 이어진 탄핵 선고 결정문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은 이 주문으로 대한민국 역사는 새로 쓰였다. 시종 담담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결정문을 낭독하던 이는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60)이다. 그로부터 2주일 뒤인 4월18일 헌법재판관 6년의 임기를 마친 그는 자택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후 강연 소식 등이 간간이 들려왔다.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강단에 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교원 공모 절차에는 응모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 그가 첫 에세이를 내놓았다. 25일 출간된 <호의에 대하여 :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가>(김영사)다. 그가 2006년 9월부터 개인 블로그 ‘착한사람들을 위한 법 이야기’에 올린 1500여편 중 120편을 선별해 묶었다. 일상에 관한 생각과 독서 일기, 사법부 게시판에 올렸던 글들이다.

책 출간에 앞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탄핵 선고 직후 인터뷰 요청에 “결정에 승복하지 않고 있는 분들에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정중히 거절한 그는 이번에는 수락했다. 지난 19일 아침, 부산행 KTX에 몸을 실었다. 그와 만나기로 한 부산시민공원은 한여름 뜨거운 햇살 때문인지 인적이 드물어 고즈넉했다. 그는 이날 처음 밝히는 탄핵심판 뒷이야기와 사법개혁에 대한 생각, 법관으로서의 삶, 그리고 김장하 선생의 가르침 등에 대해 풀어놓았다.

강의에 재주 있다는 것 새로 발견

- 어떻게 지냈습니까.

“강연 다니고, 책도 쓰면서 지냈어요.”

- 강연은 할 만한가요.

“청중들이 재밌다고 해요. 바로 반응이 와요. 그래서 아, 내가 이런 재주가 있구나, 알게 됐어요(웃음).”

- 에세이는 어떻게 출간하게 됐나요.

“태어난 흔적을 남긴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평생 책 한 권 내는 게 꿈이었어요. 처음부터 새로 쓰지 않고 블로그 글을 묶어 낸다길래 수락했고요.”

- 블로그 누적 방문객 수도 꽤 되겠어요.

“250만명 정도예요. 탄핵 선고 후 많은 분들이 들어와보신 것 같습니다.”

- 독후감 목록을 보면 문학, 정치, 경제경영, 과학, 역사, 심리, 성찰까지 독서 스펙트럼이 꽤 넓더군요.

“대학에 들어가 친구들과 대화해보니 제가 읽은 책이 거의 없었어요. 그로 인한 문화적 충격이 컸죠. 그게 동기가 돼 책을 읽었어요. 문학은 대학 때 자취를 같이한 친구(필명 완경재)를 통해 알게 됐고요. 제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지와 무경험, 무소신을 극복하고 싶어서예요. 판사는 경험에 한계가 있으니 책을 통해서라도 간접 경험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에세이를 통해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뭔가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일상임을 말하고 싶어요. 제가 산울림의 김창완 가수를 좋아해요. ‘어머니와 고등어’를 비롯한 그의 노래는 대부분 잔잔하게 일상의 행복을 이야기하죠. 편안한 멜로디에 가사도 평범해요. 김창완씨는 어느 인터뷰에서인가 우리가 일상이 주는 행복을 너무도 모르고 산다고 말했는데, 100% 동감해요. 행복을 특별한 데서 찾으니까 불행한 거예요. 일상에서 행복을 찾으려면 우선 느껴야 해요.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 그래서 문 전 권한대행은 행복한가요.

“대체로 그렇게 느끼며 살아왔어요.”

시계를 되돌렸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30분. 문 전 권한대행은 퇴근 후 혼자 관사에서 TV 뉴스를 보다가 계엄이 선포된 것을 알았다.

- 계엄 선포 소식을 접하고 처음 든 생각은 뭐였나요.

“뉴스에 첫 자막이 떴을 때는 해외토픽인 줄 알았어요. 좀 있다가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는 자료 영상이 나왔어요. 헌법재판관 한 분이 전화를 걸어왔어요. (재판관들이) 모여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 모여서 할 게 뭐냐고 물었더니, 없대요. 그러면 내일 출근해서 보자고 했습니다. 잠자리에 든 시각은 국회가 계엄해제 요구안을 의결하고 나서예요. 국회가 의결했는데 안 따를 방도가 있겠나, 생각했죠.”

- 헌재의 시간을 직감했겠군요.

“이튿날 출근길에 몰려든 기자들에게 저는 ‘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일수록 헌법이 작동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어요. 여기서 말한 헌법 속에는 당연히 탄핵이 들어 있죠.”

재임 중 선고 못하고 떠날까봐 두려웠다

- 탄핵소추된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헌재 심판정에 8차례 출석해 직접 변론했어요. 증인(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을 직접 신문하거나 증인(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을 공격하기도 했어요. 목전에서 보며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진실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다.”

- 누가 거짓말하는지 보였습니까.

“대통령이 거짓말을 하는 게 있다고 봤죠. 대통령의 주장이 너무 많은 증언들과 배치되니까요. 또 정황이란 게 있고요. 특히 ‘국회의원을 끄집어내라’는 지시를 한 적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요.”

- 탄핵심판 동안 서부지법 폭동을 비롯해 탄핵 반대 시위와 탄핵 찬성 시위가 연일 분출하며 국론이 크게 분열됐어요. 그로 인한 부담감과 스트레스는 없었나요.

“없었어요. 저는 재임 중에 선고를 못하고 나가는 게 가장 두려웠어요.”

2월25일 변론 종결 이후 별도 고지 없이 한 달 넘게 선고기일이 잡히지 않으면서 각종 설(說)이 난무했다. 5 대 3 데드록(deadlock·교착)에 걸렸다거나 심지어 문형배·이미선 재판관이 임기(4월18일 자정) 내 선고를 안 하고 퇴임할 것이라는 설까지 돌았다. 이에 대해 문 전 권한대행은 “쟁점이 10개 이상이었고, 전원일치를 하기 위해 숙고의 시간이 길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 결정문은 처음부터 인용론과 기각론 두 가닥으로 정리했다죠. 인용론 입장에서 기각론을 비판하고, 기각론 입장에서 인용론을 비판한 다음 인용론과 기각론 모두 그 비판을 설득할 수 있는 내용으로 수정하는 과정을 18번이나 반복했다고 말했어요. 인용론과 기각론 작성을 누가 할지는 어떻게 정하나요.

“주심이 인용론과 기각론을 다 써요. 나머지 재판관들은 이러저러한 점을 보충해달라거나 이렇게 표현하면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제시하죠. 그러면 주심이 반영해 다시 써요. 그게 헌법재판소 주심의 역할입니다. 소장 권한대행인 저는 평의 때마다 그날 제기된 인용론과 기각론에 대한 비판 내용을 마지막으로 요약하고, 다음 기일까지 준비해올 내용이 뭔지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죠. 사회자인 셈이에요.”

- 쟁점마다 하나씩 정리한 후 다음 쟁점으로 넘어가는 식이었습니까.

“탄핵 사유만 5개였고, 그 속의 세부 쟁점은 10가지가 넘었어요. 평의를 할 때 쟁점 1에 대해 인용론, 기각론을 쓰고 평의 과정에서 지적받은 것을 보완해 주심이 인용론, 기각론을 다시 쓰는데, 쟁점 하나조차도 한 기일에 끝나지 않아요. 그게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쟁점 2로 넘어가죠.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종합적인 인용론, 기각론 두 개로 압축하는 거예요. 그래야 나중에 표결이 쉬우니까요. 그러니 탄핵소추된 지 111일 만에 선고된 게 결코 늦은 게 아닙니다.”

그는 작심한 듯 말했다.

“작년 12월9일 기자들 앞, 그리고 작년 10월 한국법률가대회에서도 저는 헌법재판소가 완전체가 돼야 헌법 문제에 대해 답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당시 재판관이 6명밖에 없으니 속히 9명이 되도록 국회가 노력해달라는 요구였는데, 안 해주더라고요. 국회에 묻고 싶어요. 헌재가 본격 심리와 선고를 빨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줬는지. 저는 대통령이 헌재소장으로 임명하려던 분을 야당이 반대한 것도 재판소 구성 지연의 한 원인이었다고 봐요. 그런데 소장이 누가 되느냐보다 중요한 게 9명의 재판관 구성이에요. 그렇다면 대화와 타협에 능한 국회가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작은 것을 양보해야죠. 더구나 당시 공석인 재판관 3인 중 2인은 야당이 추천할 수 있었잖아요.”

대통령 탄핵 결정을 위해선 헌법재판관 6명 이상의 찬성이 있으면 되지만, 재판관 7명 이상이 참여해야 사건을 심리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2025년 1월2일 조한창, 정계선 재판관이 취임하면서 8인 체제가 됐다. 그는 말을 이었다. “선고가 급하다면서 왜 자꾸 다른 탄핵소추(한덕수·최상목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를 끼워넣습니까?”

- 당시 언론에선 헌법재판관들의 정치적 성향을 보수, 진보, 중도로 나눠 보도했어요. 재판관들의 정치적 성향이 결정에 영향을 끼칠까요.

“헌법과 법률에 따라 그리고 직업적 양심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고 봐요. 물론 무의식이란 것도 있죠. 그건 제가 논평할 사안은 아니고, 적어도 의식의 영역에선 그렇게 출발한다고 생각해요.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은 어쨌든 8 대 0 전원일치였어요. 헌법을 보면 위헌 결정에 6명의 찬성이 필요해요. 그런데 재판관 구성을 보면 보수든, 진보든 한쪽 정파가 6명을 채우는 경우는 없어요. 그건 대화와 설득을 통해 올바른 길을 찾아가라는 뜻 아니겠어요?”

다시는 살고 싶지 않은…가장 길었던 시간

- 국민과 입법부의 다수 의사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나요.

“다수 의사를 확인해가며 평의를 하지는 않아요. 어쨌든 이 사건은 다수 의사와 재판관들의 의사가 일치했죠.”

- 8월7일 개인 블로그에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하버드대 교수들이 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다시 읽었다’면서, ‘대통령 탄핵 사건 결정문 중 결론 부분에서 이 책에서 강조한 관용과 자제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썼어요.

“‘비상계엄 요건이 안 되는데 비상계엄을 선포했으니 위헌’이라는 인용론에 대해, 평의 막바지에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문제 제기가 나왔어요. 국회의 탄핵 남발과 예산 삭감 탓에 계엄을 선포했다는 피청구인 입장에서도 한 번 정당화해봐야 한다는 거죠. 그걸 민주주의의 이탈을 막는 비공식적 규범인 관용과 자제를 도입해 논의해보자고 합의했어요. 8명이 논의한 결과 국회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정. 하지만 그건 정치로 풀어야지 병력을 동원하는 계엄을 하는 것은 선을 한참 넘은 거예요. 성문의 헌법 기준으로도, 비공식적 규범을 놓고 봐도 파면이에요. 이로 인해 논쟁이 더 완전해졌어요.”

- 표결은 딱 한 번만 했다죠. 최종적으로 작성된 인용론과 기각론을 보면 결과 예측이 될 것 같은데요.

“아뇨. 아무도 결과를 미리 알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한 번 하는 거예요.”

- 8 대 0으로 나왔을 때 심경이 어땠습니까.

“안도했죠. 그리고 퇴임식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 탄핵심판 인용 결정 선고 후 김형두 재판관의 등을 툭 치고 함께 퇴장한 장면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어요.

“우선 그 양반이 고생을 제일 많이 했잖아요. 탄핵 재판 때 질문을 가장 많이 했으니까요. 두 번째로는 제 옆자리에 앉아있었으니까요(웃음).”

- 문형배 개인의 인생에서 계엄부터 탄핵 선고까지, 어떤 시간으로 기억될까요.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시간이에요. 그리고 다시 하고 싶지 않은, 다시는 살고 싶지 않은 시간이에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법치의 두 축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추석 전 국회 본회의 통과를 목표로 ‘대법관 30명 증원법’을 핵심으로 한 ‘사법개혁법’을 추진하고 있다.

- 헌재의 대통령 탄핵 선고와 대법원의 이재명 당시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한 파기환송(5월1일)이 한 달 새 나왔어요. 당시 헌재와 대법원에 대한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의 갈채와 비난이 서로 교차했죠. 민주당에선 대법원장 탄핵 이야기까지 나왔고요.

“판결을 정파적으로 보는 건 위험해요. 사법의 독립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헌법정신을 실현하는 거예요. 사법이 독립돼 있으니까 헌재의 탄핵 결정도, 대법원의 파기환송도 나올 수 있었던 거 아니겠어요? 물론 사법부가 약하긴 하죠. 정당, 대통령과 달리 사법부는 지지기반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더욱 사법의 독립이 필요해요.”

- 민주당이 추진하는 ‘사법개혁법’은 어떻게 봅니까.

“대법원이 민주당이 제기한 5대 쟁점에 대해 입장을 밝혀야 해요. 논의에 참여하지 않으면 논의의 대상이 될 뿐이니까요. 그리고 논의는 국회와 대법원이 총론뿐 아니라 각론까지 충분히 해야 해요. 예를 들면 공수처법에 구속기간에 대한 규정이 없어 윤 대통령 구속 취소 결정의 구실이 됐어요. 또 공수처 검사의 임기는 3년에 3회 연장이 가능해 최장 12년이에요. 그러면 누가 거길 가려 하고, 또 어떻게 수사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어요? 그건 공수처를 만들 때 각론 설계를 잘못했기 때문이에요. 마찬가지로 대법관 30명 증원은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 실현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에요. 그렇기에 여러 가지 수단을 비교해봐야죠.”

- 성급히 결정하다간 사달이 난다는 얘기군요.

“지금 사법부 판결이 마음에 안 들어 국회가 이렇게 입법권을 행사한다는 것 아닌가요? 그럼 사법부가 권한을 갖고 있으면 자기 맘대로 해도 됩니까?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설계된 게 헌법이에요. 어느 기관이 권력을 독점할 때 문제가 있을 수 있어요. 그렇기에 사법개혁의 방향이 옳더라도 국회와 대법원이 충분히 논의해야 해요. 정권이 교체돼도 지속 가능한 개혁이 진정한 개혁이에요.”

- 재판소원 도입에 대해선 어떤 입장인가요.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봐요. 그건 4심제가 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헌법재판소가 내린 ‘한정위헌결정’(법을 놓고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때 특정한 해석 기준을 제시해 위헌적 여지를 없애기 위한 결정)을 재심 사유로 명문화하는 게 대안이라고 생각해요. 마침 민주당 윤건영 의원이 이런 내용의 법안을 조만간 발의하는 것으로 알아요.”

- 자녀 입시비리 혐의로 징역 2년이 확정된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가 수감 8개월 만에 대통령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났어요. 뇌물죄로 구속된 공직자와 천문학적 피해를 입힌 재계 인사도 석방됐고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행정부 수장이 뒤집는 대통령 특별사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통령 특별사면은 신중하게 행사하는 것이 바람직해요. 그렇게만 말할게요.”

- 우리 사회가 여전히 ‘유권무죄 무권유죄’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보여주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습니다만.

“그건 대통령께 질문하십시오.”

인권변호사 접고 지역 법관 되기로 결심

문형배 전 권한대행은 1965년 경남 하동군 북천면의 가난한 농가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교복 살 돈이 없어 다른 이의 이름이 새겨진 낡은 교복을 입고 찍은 북천중학교 졸업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진주시 대아고를 거쳐 서울대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김장하 선생의 도움으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녔다. 대학 4학년 때인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생활과 군 복무를 거쳐 1992년 27세에 부산지법 판사로 법관의 삶을 시작했다. 부산과 경남 지역 법관으로 판사 생활 대부분을 보냈다. 2019년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헌법재판관으로 지명됐다.

- 법관의 꿈은 언제부터 꾼 건가요.

“사법연수원을 다닐 때만 해도 인권변호사가 되려고 했어요. 저희 기수(18기)가 만든 노동법연구회 활동을 하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군 복무를 마칠 무렵 생각이 바뀌었어요. 문제 제기가 아니라 문제 해결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지역 법관이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길지 않은 인생에 수십 번 이사를 한 터라, 돌아다니지 않고 한곳에 눌러앉고 싶었거든요.”

- 향판(지역 법관)을 낮춰 보는 시각도 있던데요.

“대통령 탄핵심판 때 그런 식의 기사를 봤는데, 우습더라고요. 선진국 중 일본과 우리 빼고 다 지역법관제예요. 한 번 발령받으면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거기서만 근무하죠. 판사들이 외부 영향을 잘 안 받으니 그게 재판의 독립이에요. 판사들이 유일하게 취약한 부분이 인사거든요. 어느 법원으로 전보되느냐에 따라 고무되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해요. 한곳에 있으면 썩지 않냐고요? 그러면 지방자치는 왜 해요? 지역 법관이든, 교류 법관이든 문제 있는 사람은 어디나 있습니다.”

- 과거에 재판하면서 법언(法諺·법과 관련된 격언)을 많이 썼고, 특히 ‘무거운 것은 무겁게, 가벼운 것은 가볍게’와 ‘강한 자에게는 강하게, 약한 자에게는 부드럽게’를 많이 썼다죠.

“당시만 해도 전형적인 화이트칼라 범죄는 공무원 뇌물죄와 기업의 횡령·배임죄였어요. 그런데 화이트칼라 범죄가 가볍게 처벌되는 경향이 있어요. 연구논문에 의하면 성장 과정의 유사성으로 인해 판사가 화이트칼라의 범죄를 관대하게 본다더군요. 판사는 그걸 경계해야 하죠. ‘유전무죄 유권무죄’란 말이 없도록 하려면 방법이 뭐겠어요? 뇌물죄나 횡령·배임죄를 엄히 처벌하는 거죠. 반대로 돈이 없어 합의가 안 된 교통사고 등은 가볍게 처벌했어요.”

-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재판에도 영향을 끼쳤나 봅니다.

“그보다는 범죄의 재발 방지책이 뭘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범죄 동기가 환경이라면 환경을 개선하도록 도와줘야 해요. 탐욕 또는 어떤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엄정한 형을 선고해 그 계산을 바꿔줘야 하고요.”

- 피고인에게 종종 책도 선물했다더군요.

“주로 풀어주는 사람한테 준 거예요. 그냥 풀어주면 뜻을 모를 수도 있잖아요. 또 그 책의 내용이 그 사람의 삶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고요. 가난한 사람은 범죄를 저지를 동기가 많아요. 책을 사주면서 그 속에 차비 하라고 돈을 넣어주는 판사도 있어요. 착한 판사들 많아요.”

정치권·영리목적 로펌행 전혀 생각 없어

- 2019년 4월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에서 27년간 법관 생활을 했음에도 재산이 6억7545만원(부친의 재산을 제외하면 4억원)밖에 안 되는 이유에 대해 ‘결혼할 때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어요. 왜 그런 결심을 했나요.

“그게 좋은 판사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결혼할 때 장인·장모께 그렇게 살고 싶은 제 마음을 존중해주시면 좋겠다고 편지를 썼어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도 재판받는 사람의 삶의 처지를 이해하는 사람이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고요. 하지만 지금은 우리 부부의 재산이 12억 정도니 다짐이 깨졌죠. 헌법재판관이 되고 3년 후 아내가 상속·증여를 받았거든요.”

- 온 가족이 롯데 자이언츠 열혈팬이라고요.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누구인가요.

“저는 전민재인데요. 요새 잘 못해서 김원중으로 바꿀까 생각 중입니다(웃음).”

-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매일 이곳(부산시민공원)에서 산책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부산지법에 가서 테니스를 쳐요.”

- 주량은 얼마나 됩니까.

“헌법재판관 되고부터 술은 거의 안 마셨어요. 반주도 안 했고요. 업무에 전념하기 위해서였어요.”

- 애창곡은?

“안치환씨의 ‘내가 만일’. 가수도, 가사도 좋아요. (산울림 노래는? 하고 묻자) 좋아하지만 부르기가 힘들어요. 내가 부르면 그 맛이 안 나요(웃음).”

-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강단에 안 서기로 했죠. 그러면 계획이 뭔가요.

“비수도권 대학에 가는 것을 목표로 알아보고 있어요.”

- 정치권이나 대형 로펌의 부름은 없습니까.

“정치권엔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 영리 목적의 로펌에 갈 생각도 없고요. 다만 공익 목적의 법무법인은 (마음을) 열어놓을 생각이에요.”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그는 ‘공동선(共同善)’에 대해 말했다. 김장하 선생의 가장 큰 가르침이라고 했다. 김장하 선생은 사법시험 합격 후 찾아간 그에게 ‘만일 내가 자네를 도운 게 있다면 나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나는 사회에서 얻은 것을 사회에 돌려주었을 뿐이니 자네는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선생의 뜻을 실천 중이냐고 묻자 문 전 권한대행은 “노력은 하는데, (김 선생과 사회에) 갚아야 할 빚이 산 같다”고 답했다. 카페에서 나와 공원 벤치에 앉아 있을 때였다. 한 청년이 다가와 음료수 두 병을 건넨 후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문 전 권한대행은 보일 듯 말 듯 그를 향해 목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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