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갖고 태어나도 삶을 바꿀 기회 얻어야죠”

2025-11-16

세 번째 에세이 펴낸 ‘월가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 신순규씨

안내견 죽음 이후 맞은 낯선 현실처럼, 미국은 헌법 가치 무너져

‘개천서 용 나기’ 통하지 않는 한국, 정해진 틀에서 탈출하기 어려워

영혼의 깨끗함 유지하려 글 써…은퇴 후 자살률 줄이기 힘쓸 것

아홉 살에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맹학교를 다니다 어머니의 권유로 피아노를 배웠고 열다섯 살에 홀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뒤 애널리스트가 됐다. 투자은행 JP모건에서 일하기 시작해 시각장애인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공인재무분석사(CFA) 자격을 취득했고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투자회사 브라운 브러더스 해리먼에 재직 중이다. 신순규씨(58) 얘기다. 그가 세 번째 에세이 <할 수 있다 생각하고 방법을 찾아봅시다>를 냈다. 책 출간을 기념해 방한한 그를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민음사 사옥에서 만났다.

입지전적인 경력답게 대단한 이야기로 시작할 것 같지만, 책은 그의 안내견이었던 ‘빅’과 ‘지기’에 대한 추억으로 풀어나간다. 과거 사고와 질병으로 2마리의 안내견을 잃고 “나에게 세 번째 안내견은 없”다고 선언한 일화다.

“첫 안내견을 스무 살쯤에 들였어요. 안내견과 주인은 굉장히 특별한 관계를 가져요. 24시간, 잘 때도 일할 때도 항상 같이 있어요. 그런 강아지가 갑자기 죽는 건 굉장한 트라우마예요. 안내견이 아무리 오래 주인과 같이 있어도 대략 10년이고 그럼 70까지만 살아도 5마리의 안내견과 이별해야 한다는 건데, 혜택에 비해 코스트(상실감)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죠. 그 뒤부터는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쓰고 있어요.”

책은 이렇듯 사소한 일화를 매개로 장애인의 현실, 투자와 경제적 성공에 대한 단상, 미국이라는 나라의 현재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안내견 일화는 미국의 현실과 연결된다.

지팡이를 쓰며 그는 “매일 걸어 다녔던 곳들이 갑자기 낯설게” 변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최근 미국의 현실이 그에게 그렇다. 그는 “나는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헌법에서 비롯되는 이상을 신앙 다음으로 크게 여기는데, 현재는 이런 가치들이 무너지고 있다. 각각의 세력이 굉장히 극과 극으로 분열돼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세상을 낙관한다. 책 제목처럼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하면 된다고 믿는다. 보육원 출신 아이들을 돕는 야나 미니스트리(YANA Ministry)의 이사장, 시각장애인 음악가를 지원하는 벨라음악재단의 후원회장으로 활동하는 그의 이력은 이 때문이다. 신체 혹은 사회·경제적 한계를 가지고 태어났더라도 성장 과정에서 누구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월가의 생활에서 은퇴한 뒤 계획을 묻자 한국의 높은 자살률 감소를 위해 노력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이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태어날 때) 정해진 틀과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나만의 정체성을 만들 수 있는 사회여야 하는데, 한국은 그러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정해진 틀에서 탈출하지 못할 때 한국에서 자살이라는 것이 탈출구처럼 여겨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삶은 2022년 TV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하고 더 화제가 됐다. 책엔 화려한 그의 삶이 담겼나 싶지만, 아내를 포함한 가족 이야기가 주다. 그는 “아내가 자기 얘기 좀 쓰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아내가 내 세계에서 아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사람들은 월가에서 일한다고 하면 사회생활도 많이 하고 쿨하고 화려한 모습을 떠올리는데 내 삶은 아주 단조롭다”고 말했다.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에 이어 세 번째 책이다. 현재 차기작도 집필 중이다.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버드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을 위한 면접을 도와주는 일을 했었어요. 부모님이 튀르키예분이고 이민 온 지 얼마 안 된 학생이었는데 어려운 환경에서도 바이올린을 연주했어요. 그 아이에게 왜 바이올린을 연주하냐고 물으니 이렇게 말했어요. ‘내 영혼의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글 쓰는 게 저한테는 그래요. 글을 통해 내 감정을 컨트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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