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구조조정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가운데 일본이 40년 동안 진행한 구조조정 경험을 전략적으로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석화 구조조정 작업을 단기간에 끝내려면 세제 감면, 현금 지원 등 일본을 뛰어넘는 수준의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진단이다.
28일 삼일PwC는 ‘일본 석유화학 구조조정 사례와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세 차례 구조조정을 통해 과잉설비 해소, 고부가가치 전환, 글로벌 확장 등을 달성한 일본 사례를 분석해 한국 구조조정의 실질적 방안을 제시했다.
일본 석유화학 산업은 1980년대 초반 중소형 설비의 무분별한 증설과 원유·나프타 가격 폭등에 따른 원가 급등, 중국산 저가 공세 등으로 위기에 놓였다. 일본 정부는 특별산업구조개선임시조치법(산구법)을 제정하고 노후·중복 나프타분해시설(NCC)에 대한 폐쇄를 명령하면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이에 설비 가동률이 오르고 생산성이 회복됐지만 과도한 정부 개입으로 시장 자율성이 훼손됐다는 비판도 받았다.
1990년대 이후로는 일본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지면서 석유화학 산업 수요가 급감했다. 이때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 대신 산업활력재생특별조치법(산업재생법)을 도입해 시장의 자발적인 인수합병(M&A)과 점진적인 통합을 추진했다. 삼일PwC는 “이때 일본은 합병·분할·합작이 빠르게 이행되도록 규제를 풀고 세제·절차 특례를 부여해 고기능 소재와 전자재료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고도화했다”고 평가했다.
3차 구조조정이 진행된 2000년대 키워드는 자율과 글로벌이었다. 정부는 규제 완화와 세제 지원에 집중하며 한발 물러서고, 기업은 콤비나트 통합과 해외 거점 확장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했다. 콤비나트는 생산과정에서 상호 보완적인 공장 등을 한 지역에 모은 기업 집단을 말한다. 당시 스미토모, 미쓰비시, 미쓰이 등은 과잉 설비를 과감히 폐쇄하고 고부가 전환의 속도를 높였다. ‘정부가 시켜서 한다’가 아니라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바꾼다’라는 시장 본능의 실험장이었다는 것이다.
삼일PwC는 한국 석유화학산업 역시 중국발 저가 공세, 글로벌 증설로 국내 가동률이 하락하는 문제에 직면했다고 평가했다. 롯데케미칼과 HD현대케미칼이 NCC 통합을 시도하면서 구조조정 신호탄을 쐈으나 공정거래 심사, 주식매수청구권, 세금 부담 등 제도 장벽이 높다는 문제도 지적했다. 이에 일본 산업재생법 취지를 반영해 기업활력법(원샷법)을 실질적인 인센티브 중심으로 개편할 것을 제안했다. 단순히 절차를 간소화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세제 감면, 규제의 ‘영구적’ 유연화, 금융·보증 패키지, 현금성 인센티브 등 ‘한국형 구조조정 패키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본이 40년 동안 구조조정을 진행했다면 한국은 2년 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최창윤 삼일PwC 딜 부문 대기업 재무자문 서비스 리더(파트너)는 “석유화학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기업이 과잉 설비를 줄이고 고부가 중심으로 전환하려면 한국은 일본보다 더 강력한 규제 완화와 실질적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수빈 딜 부문 석유화학섹터 담당 파트너도 “규제 완화, 세제 지원, 노조와 지방자치단체 조정은 정부가 하되 기업은 어디를 구조조정할지 정하는 일본식 모델을 참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