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 도시와 농촌을 지배하는 색깔은 붉은색이다. 크리스마스와 김장. 비슷하나 다르다. 산타클로스의 빨간 의상이 한 음료회사가 마케팅을 위해 만든 얕은 색깔이라면 김장의 색은 묵직하고 강렬하며 현실적이다. 그냥 찍어 바르면 나오는 색이 아니다. 고춧가루 하나만으로는 깊은 색을 낼 수 없다. 육수와 온갖 열매를 갈아 넣은 농축액의 발현이다.
김장용 깔개에 둘러앉은 동네 어머니들의 손은 배추 마사지로 바빴다. 마을의 김장은 도장깨기식으로 진행된다. 날짜와 시간이 겹치지 않도록 각 집의 디데이(D-day)를 사전 조율한 뒤 10명 정도의 어머니들이 하루에 2건 정도씩 해치우는 방식이다. 오봉댁 어머니네도 350포기짜리 2차전을 치르는 중이었다. 깔끔하게 치운 창고에서 가족을 포함해 20명 정도가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여기!” “예. 갖구 가요!”
“막둥아!” “다 펐어요!”
문장에 주어나 목적어가 없어도 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틈틈이 깔깔거리는 호흡 소리와 관절 통증을 호소하는 감탄사만으로 하나의 세상이 돌아간다. 서울·경기 지역에선 무채를 써는 게 김장의 주요 작업인데 남부지방 김치에서는 무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곤죽 상태인 시뻘건 양념의 내용이 궁금했다.
“치적치적하다고 무는 채로 안 써. 다 갈아 옇지. 마늘 생강 청각 멸채젓, 젓은 액젓도 쓰고 갈아서도 옇고.” 오봉댁 어머니는 중간중간 가족의 도움을 받아가며 복기하셨다.
“디포리(밴댕이 새끼 혹은 보리멸) 다시마 버섯 양파 국멸치로 육수 내고. 그 덕에 조미료 안 써.”
말씀하시던 어머니가 잠깐 호흡을 고르는 틈을 노려 막내며느리가 치고 들어왔다.
“배 사과 무 갓 대파 쪽파 미나리 참깨…”
어머니가 다시 키를 잡으셨다.
“무는 갈아 옇고 갓은 곱게 썰어 여. 그전엔 밤도 썰었어. 한 스무 가지 넘게 들어가나 몰라.”
이 많은 걸 준비하시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옛날엔 식구가 많응께 일주일이면 다 했는디 인자는 두 배 걸려. 노느니 멸치 똥 깐 거루 치면 한 달 걸렸으까?”
모름지기 김장의 대장은 어머니다. 연중 농사와 행사를 통틀어 진두지휘의 기운을 놓지 않던 아버지들도 잠시 구석에서 조연에 만족한다.
“아이구아이구 인자 모대(못해). 올해꺼정이 끝이여.”
자리에서 일어서던 어머니들이 신음을 섞어 선언한다. 아버지들이 “올해로 농사 끝이여”를 매년 반복하듯 어머니들도 비슷하다. 들어오던 푸념이지만 올해는 느낌이 유독 싸하다. 평균 연령 80세, 최연소 참가자 65세인 김장 선수들의 은퇴를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까.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김치가 아닌 김장이 등재된 이유가 있을 텐데 어떻게 지킨다는 건지 모르겠다. 종묘만큼 김장도 중요한데, 종묘는 계속 그 자리에 있지만 김장은 한번 멈추면 이어가기 힘들 텐데 말이다. 뒤늦은 아쉬움이 필연이 아니길 바란다. 얻어먹는 김치가 끊길까 걱정하는 건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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