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투병에 말 잃었던 아내의 마지막 한마디

2025-06-18

아내는 60대 초반에서 20여 년 동안 병중에서 지냈다. 심한 뇌졸중으로 죽음의 고비는 넘겼으나 말을 하지 못하는 세월을 살아야 했다. 20여 년 동안 말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대뇌의 언어기능이 소멸하였기 때문에 허사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내의 고통은 무거운 짐이었으나 의사소통의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어렵게 소통한 다음 눈물 흘려

한 번은 외출에서 돌아온 나에게 무슨 말을 해야겠는데 표현할 수 없으니까 애태우다가 단념했다. 다음 날 아침, 아내는 중요한 일인 듯이 설명하고 싶었으나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해답을 찾아보다가 아내의 간절한 부탁을 알아낼 수 있었다. 독일에 있는 큰아들이 딸애기를 낳았는데, 백화점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서 보내자는 간청이었다. 이틀 전에 출산 소식을 전해 들었던 때부터의 소원이었다. 소통되었을 때는 둘이 한참 웃었다. 성공했다는 만족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둘이 손을 맞잡고 또 웃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는 나 혼자 몰래 눈물을 닦아야 했다. 아내가 그렇게 만족하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20년 투병에 말을 잃었던 아내

손 붙잡고 마지막 기도 드릴 때

또렷한 음성으로 “아멘” 화답

아내 사별 20년, 내 마지막 말은

병중의 아내를 데리고 미국 텍사스주에 사는 셋째 딸 집으로 갔다. 다리의 재활치료를 받기 위해서다. 학기 초가 되면서 나는 대학 강의를 위해 한국으로 가야 하니까, 그동안 잘 치료받고 방학 때 다시 올 테니까 그때 함께 산책 다니자고 약속했다. 여러 가지 시설을 갖추고 노력하면 지팡이 짚고 걸어 다닐 수 있겠다는 의사의 권고이기도 했다.

아내는 내가 다시 올 때는 걷도록 하려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노력했다. 3개월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방학 때가 되었다. 학교 일을 끝내고 곧 떠났다. 휴스턴 비행장에서 만난 아내는 자동차 안에서 나에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는 간절한 표정이었다. 나는 몇 가지 잘못 알아들은 얘기를 꺼냈다가 “아! 아, 다시는 헤어져 있지 말고 같이 있자고?” 했다. 아내는 웃었다. ‘그 뜻이었다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내는 그날 아침부터 나를 기다리고 만나기 위해 몹시 힘들었을 것이다. 집으로 오는 자동차 안에서는 내게 기대어 계속 잠에 빠졌다. 이제는 안심이 되었다는 안도감에서 깊은 잠을 자는 것 같았다.

귀국은 아내와 같이했다. 그렇게 7년 동안 건강을 되찾기 위해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10여 년은 비슷한 상태로 지냈다. 주기적으로 주치의를 찾아 도움을 받고, 가족들의 사랑도 극진했다. 아내는 욕심이 없고 마음씨가 착했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곁을 떠나지 않고 보살펴 주고, 나도 가급적 많은 시간을 아내 곁에서 보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내는 내가 자기 때문에 고생하고 해야 할 일을 못 할 것 같아 내 걱정을 더 많이 했다. 내가 오늘은 아침에 지방 강연 갖다가 늦게 돌아올 테니까 재활 운동도 다녀오고 기다리라고 부탁하면 어서 떠나서 좋은 강연 하라는 표정이다. 저녁에 돌아오면 아내의 표정은 언제나 같았다. ‘강연회가 잘 되었느냐?’는 물음이다. “당신의 기도 덕택으로 모두 만족했다”라고 대답한다. 아내는 말은 못 하면서도 ‘나 때문에 당신이 하는 일에 지장이 되면 죄송해서 어떻게 하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는 동안 외국에 나가 있던 애들도 학업을 끝내고 돌아오고, 크게 자란 손주들의 보살핌도 계속되었으나 아내의 병세는 악화하기 시작했다. 병원 신세를 지어야 하면서 간병 아주머니의 도움도 무거워졌다. 잠드는 시간은 길어지고 의식과 기억력도 약해져 갔다. 할 수 없이 장기간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70대 후반부터는 회복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얼마나 더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까를 걱정했다.

일반 병실에서 응급실로 옮길 때는 주치의도 20년이나 병세를 유지해 온 것이 기적 같다고 말했다. 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오전과 오후에 허락된 시간에만 병세를 보고 오는 것이 전부였다. 내 딸이 순번이 되어 보고 나와서는, 표현은 힘들었으나 나를 쳐다보는 모습이 ‘네가 왔구나’ 알아보는 표정이었다고 했다.

내 마지막 말도 ‘아멘’으로 끝날 것

교회 사모가 문안을 왔다. 전부터 친분이 있는 주치의가 댁으로 돌아가서 마지막 치료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병원에서 뒷받침도 해 주겠지만 다른 환자를 위해 병실을 양보하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나는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 좋겠다고 애들의 동의를 얻어 정해주는 날에 퇴원할 준비를 했다.

퇴원하기 전날 늦은 오후에 내가 마지막으로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가서 더 가까이 보살펴 주겠다면서 아내의 손을 꼭 붙들고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아버지, 지금까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머물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이끄심과 부르심을 감사히 기다리겠습니다. 지나간 어느 때보다도 아버지의 사랑이 함께할 것을 믿고 맡기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저와 가족들보다, 더 높고 영원하신 아버지의 사랑에 맡기겠습니다”라는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끝내면서 아내의 또렷한 음성을 들었다. “아~멘”하는 아내의 마지막 말이었다. 내가 놀라움을 머금고 아내의 얼굴을 보았다.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20여 년을 병중에 있다가 마지막 남긴 말이 “아멘”이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는 기도였다.

아내를 보낸 지 20여 년이 지났다. 나도 남길 수 있는 마지막 말이 있다면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라는 ‘아멘’으로 끝날 것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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