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기준 / A New Norm
1945년 9월 학교로 돌아가는 내 마음에는 엇갈리는 느낌이 있었다. 영국인이 돌아왔으나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과도기 동안 민족집단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어 말라야 여러 곳에서 민족 간 보복 살해 사태가 일어났다. 그 점에서 이포는 다행이었지만 영국인의 위신은 눈에 띄게 떨어졌고, 식민지 정부의 권위도 크게 약해졌다.
영국군정청(BMA)은 이전의 공무원 중 일본 편에 분명히 섰던 사람들 외에는 모두 원직 복귀를 명했다. 모든 학교 학생들은 전쟁이 아니었으면 1942년에 올라갔을 학년으로 등록하도록 했다. 교사들도 돌아와 일본식 학교에 다니거나 나처럼 학교를 다니지 않은 학생들의 학년을 정하는 일에 참여했다. 영국식 학교와 중국인 학교에 특히 지원자가 많았다.
공식 방침은 1941년 12월 이후의 일을 가급적 감안하지 않고 그 전 단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현실적 방침임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학생들 중에는 136부대에 들어가 영국 편에서 참전하거나 말라야공산당이 조직한 말라야인민항일군(MPAJA)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고 일본 편에 섰던 사람들도 있었다. 정상적 교육의 재개를 모두 반가워했고, 전쟁 중에 공식적 ”교육“을 받은 흔적이 없는 나는 너무 아래 학년에 남겨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무엇보다, 수학과 과학에서 본과 5학년 이후의 공부가 전혀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학교 당국은 학년을 올려주려고 안달이었고 내게는 강점 하나가 있었다. 영어, 특히 그 읽기와 쓰기가 탁월했다. 영어 선생님이 나를 올려주고 싶어 하고 수학 선생님도 보충수업을 해주겠다고 나서준 것이 다행이었다. 본과 7학년 진급이 일단 결정되었다가 수학 선생님의 보충수업 방침이 나온 후 한 학년 더 올려 8학년이 되었다. 내 자존심에는 맞는 결과였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과학 분야로의 내 진출 가능성을 틀어막은 결과이기도 했다. 수학-과학 과목들을 따라잡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허점을 완전히 메울 수 없었다. 생물 과목은 좋아했으나 물리와 화학 과목은 내내 힘들었다.
공부 자세를 잡는 데도 힘이 들었다. 충분한 시간을 쓰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과목은 수학 하나였다. 열성적인 선생님이 공부를 재미있게 만들어준 덕분이었다. 그래서 1945년 말에는 졸업시험을 준비하는 졸업반으로 올라갈 만큼 진도를 따라잡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행이었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1945년에 올라갔을 학년이었다. 3년 동안 학교를 못 다녔는데 이제 원래 자리에서 겨우 1년 뒤진 자리를 잡은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노력이 필요한 부분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러나 솔직히 대영제국사, 자연지리, 일반과학 같은 과목에는 도무지 흥이 나지 않았다. 영어와 수학의 좋은 점수가 아니었다면 졸업장을 받지 못하고 어느 대학에도 갈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공부의 집중을 가로막은 두 가지 일은 지금 돌아보아도 변명할 길이 없다. 하나는 항일투사 출신 노동운동가들의 영향을 받는 시내의 불안한 상황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전쟁 전에도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이 있었으나 대공황과 정부의 엄격한 탄압 아래 조직이 약화되고 많은 지도자들이 중국과 인도로 추방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노동자들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좌익 지도자들이 나타나 조직을 만들고 노동조건 향상을 요구하며 소요를 일으켰다. 중국인 노동자들의 호응이 특히 컸다.
영국 군정부는 적절한 대응을 할 능력이 없었고 모든 지역 노동자들 사이에 소요가 확산될 조짐이 보였다. 3년 반의 시내 생활 경험으로 나는 민간 소요의 중요성을 알아볼 수 있었고,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애를 썼다. 노동자의 권리에 관한 공부가 없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하려고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또 하나 문제는 스스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포의 영화관에 영국-미국 영화가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몇 년간의 굶주림 끝에 나는 영화식탐증 증세를 일으켰다. 형편없는 영화를 봐도 증세가 꺾이지 않았다. 다음 영화는 괜찮을 거니까.
이 편집증의 원인을 꼭 짚어 설명할 수 없다. 1943-44년 중의 영국 소설 읽기와 라디오 전쟁뉴스 듣기에 일부 원인이 있었을 것 같다. 이포를 떠나 중국으로 돌아갈 목전의 계획 때문에 현실과의 절연감을 느낀 점도 생각할 수 있다. 중국에서 어떤 상황을 맞을지 불확실했고 어두운 영화관에 앉아 있는 동안은 일종의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달라질 중국 대학에 진학할 내게는 앤더슨학교에서 공부하는 생활이 내 인생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으로 느껴졌다.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새 출발을 할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영어와 중국어 두 언어의 능력, 그리고 수학의 충분한 이해뿐이었다.
말라야에 전쟁이 닥쳤을 때 그곳 중국인들은 태도를 정해야 했다. 국민당 지지자들은 왕징웨이 편이라는 시늉을 할 수 있었지만 일본인들은 쉽게 넘어가 주지 않고 공포정책을 펼쳤다. 굴복까지는 아니라도 침묵을 강요하는 정책이었다.
아버지가 동남아시아로 간 까닭은 해외 중국인의 교육이라는 목표에 있었고, 페락 주 중국인 학교의 수준 유지와 새 세대 교사들의 양성을 위해 열심히 일하셨다. 정치 문제를 조심스럽게 피하셨고 정치 얘기를 내게 하신 일이 없었다. 그런 분에게도 일본 점령기는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그렇게 짐작하는 까닭은 군벌 시대를 끝낸 난징 국민당정부를 그분이 지지하고 중국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통제하려는 일본의 시도에 대한 국민당의 저항에 공감하셨기 때문이다.
영령 말라야에 오실 때 그분은 국민당정부의 확립 전부터 멀리서 바라보며 일본의 획책을 알아보고 계셨다. 산둥성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첫 괴뢰국 만주국을 세우고 나아가 몽고와 북중국을 넘보는 것을 보며. 그뿐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도 걸려있었다. 1936년에 중국으로 돌아가려던 소망이 전쟁의 위협으로 좌절되고 페락 주에서 계속 일하게 되셨다.
그곳 중국인의 민족주의 고조를 예민하게 느끼면서 학교 교재에서 정치적 내용을 줄이도록 감독하는 주 교육국에서 근무하는 것이 늘 불편하셨다. 중국인학교 교재는 대개 상하이에서 출판되는 것이었는데, 영국인들은 지역 중국인학교 교재에 민족주의 또는 반제국주의 내용이 들어가는 것을 한사코 막았다. 반-영국적 내용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일본 점령기에 아버지 처지가 어떤 것이었는지 나는 너무 어려서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일본을 위해 일하지 않으실 것은 분명했고,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실 수 있을지 점령기 초기에 궁금해했다. 약간의 저축이 있어서 조그만 사업에 참여도 하셨으나 재미 보신 일이 없었다. 저축이 떨어져 가자 개인교수를 조금씩 하면서 생활을 검소하게 하셨다.
일본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표시로 교육국의 낮은 직급 일을 맡으셨지만, 다른 일 기회를 계속 찾으셨다. 전쟁 끝나기 전에 충삼 씨 집 가정교사 일을 얻은 것은 행운이었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내게 마음을 털어놓으신 일이 없었다. 1947년 난징에 갔을 때 전쟁 중 왕징웨이 정권에 참여한 부역자들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들으며 점령기 생각이 났다. 말라야 중국인 중에 왕징웨이와 연줄이 있고 가짜 국민당을 지지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이 문제에 예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왕징웨이 정권을 지지하는 파벌과의 관계 때문에 태도를 바꾸는 친구들을 많이 보면서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굳어지셨던 것으로 이해되었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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