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미는 불안과 분노 달래준 단순한 반복 작업

2025-05-08

루이즈 부르주아의 ‘크로셰’ 판화 시리즈

‘가정적인 남자’에 비해 ‘가정적인 여자’라는 표현은 확실히 드물게 쓰인다. 과장하자면 동어반복의 느낌마저 든다. 대체로 여자는 가정적이라고, 아니 여자는 곧 가정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감각을 그대로 드러내는 작품을 20여 년 전에 본 적이 있다. 커다란 거미 조각으로 유명한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의 작품이었다. 제목은 ‘팜므 메종’, 직역하면 ‘여자 집’이다. 여성의 신체와 건축물을 하나로 결합시킨 회화이다. 이 작품이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관객을 보았기 때문이다. 전시장에서 우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음악이나 영화와는 달리 미술작품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자극은 속도가 느리다.

좀처럼 갖기 어려운 평안한 마음

어머니 바느질 기억 되살려 표현

외도 아버지에 대한 평생의 분노

강렬한 작품, 단순한 추상에 담아

여성의 역할과 가족에 대한 애증

머리가 집인 ‘팜므 메종’으로 표출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루이즈 부르주아의 ‘팜므 메종’을 종종 떠올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아이와 집과 나를 동일시하는 스스로가 의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처음 제작된 것은 1946년으로 작가가 30대 중반인 때였다. 여섯 살 전후 남자아이 셋을 키우면서 예술가로서의 커리어를 이어가려고 고군분투하던 시절이었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작품 속 여성은 머리가 집으로 대체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가장 연약한 신체 부위가 외부에 노출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1960~70년대의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이 작품에 대하여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정체성을 잃어버린 여성의 삶을 표현했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루이즈 부르주아는 1911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작가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는 병약한 어머니를 두고 지속적으로 혼외 관계를 가졌다. 그중에서도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겸 집안일을 돕기 위해 고용된 영국인 여성과의 관계는 10년이나 이어졌다. 집안의 영어 교사가 아버지의 애인이면서 어머니를 병원에 태우고 다니는 운전사이기도 한 기묘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한집에 살았다. 겉으로는 가족 모두가 모르는 척, 일종의 역할극에 참여하듯 평범한 일상을 수행했다. 그러나 예민한 기질을 타고난 사춘기 소녀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아버지 해체해 뜯어먹는 ‘아버지의 파괴’

작가가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이 시절에 마음 깊은 곳에서 자라난 분노는 평생 예술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다. 부르주아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제목이 ‘아버지의 파괴’이다. 아이들이 저녁 식탁에서 아버지의 몸을 해체하여 먹는 장면을 거대한 반추상의 설치 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아버지의 장광설을 들으며 식사를 하던 어린 시절, 빵조각을 손가락으로 주물러 사람 모양으로 만든 후 팔다리를 하나씩 뜯어 입에 넣은 기억이 바탕이 되었다. 1974년 작이니 이때 작가 나이는 이미 63세였다.

루이즈 부르주아는 평생 분노와 불안을 안고 살았던 것 같다. 대학에서는 수학과 기하학을 전공했는데, 이유는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규칙을 공부할 때만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이었다. 스물두 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다행히 손으로 재료를 만지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그녀는 심리적 안정을 찾았고, 9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매체와의 물리적인 상호작용에는 치유적인 기능이 있다.”

부르주아는 대학 졸업 후 파리를 방문 중인 미국인 교수를 만나 결혼했다. 미술사학자인 남편은 차분하고 온화한 성품이었다. 파리를 떠나 남편과 함께 뉴욕에서 자리 잡은 그녀는 세 아이를 키우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결혼과 함께 비교적 평범한 삶에 안착한 것으로 보였지만 내면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울증과 불면증에도 자주 시달렸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지속되면 너무 날카롭게 굴어서 가족들이 모두 긴장했다고 한다. 노년에는 광장공포증 때문에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했다.

주변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부르주아는 분노를 드러내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생전의 모습을 기록한 영상에도 화가 나서 작품을 부수거나 사람들에게 독설을 내뱉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녀도 이런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나의 모든 작품에는 분노가 있다. 작품 만들기를 멈추면 나는 가족을 공격했다.”

결국 부르주아에게 예술은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이자 불안을 잠재우는 치료제였다. 그녀는 인간의 신체나 동물의 형상을 이용한 강렬한 이미지의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지극히 단순한 형태의 추상 작업도 평생 병행했다. 단순하고 규칙적인 형태가 반복되는 이런 작품들은 그 자체로 치유와 해소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크로셰’ 시리즈도 그러한 예이다. 크로셰는 코바늘 뜨개질을 의미하며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연관된다. 부르주아는 어렸을 때 부모가 운영하던 태피스트리 수선 공장에서 종종 어머니의 일을 도왔다. 그녀의 기억 속 어머니는 늘 바느질을 하며 잘못된 부분을 수선하는 온화한 자태, 즉 치유하는 자의 모습이었다.

주로 빨간색의 실이나 선을 이용하여 단순하고 아름다운 형태로 만들어낸 이런 작품들은 그녀가 평생 지향했으나 한 번도 온전히 가지지 못한 평안의 상태를 표현한 듯하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 공정은 마음 깊은 곳에서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불안하고 어지러운 감정들을 정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증오와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아버지

다시 처음 작품, ‘팜므 메종’으로 돌아가 보자. 이 작품에서 여성의 몸에 결합된 건축물은 대체로 여성을 속박하는 부정적인 요소로 해석된다. 그런데 부르주아는 건물이나 건축 구조 자체를 좋아해 단독의 드로잉으로도 많이 그렸다. 그리고 이런 드로잉들에 덧붙인 메모에서 “건축물은 안정감을 주는 피난처”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집이라는 공간에 대해 가진 감정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나의 자유를 구속하는 답답한 울타리. 그러나 불안할 때 돌아가 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

가족에 대한 감정도 양가적이었다. 부르주아는 여러 작품 속에서 아버지를 근원적 분노의 대상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막상 프랑스를 떠나온 후에는 아버지를 그리워했고, 그가 뉴욕을 방문했을 때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아이 셋에게는 남편의 성이 아닌 자신의 성을 붙였는데 이유는 단 하나, 아버지의 소원이었기 때문이다. 1951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크게 상심하여 심리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이 치료는 상담사가 사망할 때까지 30년이나 지속되었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삶과 예술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이다. 그런데 정작 부르주아는 자신의 예술을 페미니즘의 맥락으로 접근하는 것에 다소 떨떠름해 했다. 그녀가 자전적 소재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은 무엇보다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다양하고도 복잡한 감정들이었다. 사실 굳이 정신분석학까지 끌어들이지 않아도 우리는 경험적으로 이해한다. 혈연과 감정으로 맺어진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원래 모순으로 가득한 복잡한 세계임을.

가정의 달에 볼 만한 ‘젊은 모색’전

가족 관계에서 발생하는 복잡하고 다채로운 감정들은 종종 흥미로운 예술 작품을 탄생시킨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젊은 모색’에도 이런 작품이 하나 포함돼 있다. 자전적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조한나의 영상 작품이다. 제목은 ‘뱃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 엄마와 딸 사이에 쌓인 오랜 감정의 응어리가 폭발하는 짧은 애니메이션이다. 유년기에 받은 상처를 무기처럼 장착하고, 이제 갓 성인이 된 딸이 엄마를 대면한다.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유발하는 이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새삼 깨우쳐 준다.

때로는 안락하게, 때로는 갑갑하게 느껴지는 공간이 집이다. 분노와 불안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가 가장 큰 위안을 주기도 하는 관계가 가족이다. 희생과 헌신이 이기심과 뒤섞이고, 상처를 주면서도 사랑과 이해를 기대하게 되는 복잡한 감정 공동체. 우연한 기회에 루이즈 부르주아와 조한나의 작품을 연달아 보면서 가족의 의미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한 번쯤 생각하게 되는 계절이다. 마냥 좋은 기억만 떠오른다면, 축하한다. 그러나 좀 더 복잡한 마음이 든다면, 혹은 인간 감정의 모순적 측면에 흥미를 느낀다면, 이런 작품들을 감상하며 5월을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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