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마디 굳어 선 좀 튀어나가도, 그림엔 오타가 없으니까…”

2025-05-09

91세 아이패드 그림작가, 여유재순의 슬기로운 노년생활

“늙는 건 참 서글픈 일이더라고요. 아이패드 사러 매장에 갔더니 직원이 인사는커녕 응대도 제대로 안 해주는 게 여실히 느껴졌어요. 늙은이가 설마 저걸 살까 싶었는지 뭘 물어도 자꾸만 손주 데리고 오라는 거야. 자존심이 팍 상해서 그 자리에서 아이패드랑 펜까지 사왔다니까.”

분신과도 같은 아이패드를 어루만지던 유재순(91)씨가 처음 태블릿 PC를 사러 갔던 때를 회상하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곱게 빗어넘긴 백발이 반짝반짝 빛났다. ‘여유재순’이란 필명으로 알려진 유씨는 5년 전부터 태블릿 그림 작가로 활동 중이다. 매일 그린 그림을 SNS에 올리며 젊은 세대와도 활발히 소통하고 있다.

꽃과 나무·풍경 등 자연물을 주로 그리는 그가 그동안 SNS에 올린 작품만 어느덧 1700여 점. 그림 계정 팔로워도 9만8000여 명에 달한다. 유씨는 “손님(팔로워)들이 어디서 보고 그렇게 찾아오는지 참 신기하다. 아흔 넘은 노인네 그림을 이렇게 좋아해 주니 그저 고마울 뿐”이라며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팔로워들에게 감사 인사부터 전했다. 가정의 달을 맞아 “나이는 숫자일 뿐”이란 그를 만나 ‘건강하고 활기찬, 슬기로운 노년 생활’에 대해 들어봤다.

태블릿 사러 가니 손주 데려오라 면박만

SNS에 태블릿 PC까지, 무엇보다 디지털 친화적인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동네 주민센터에서 컴퓨터를 열심히 배웠거든요. 나도 옛날엔 컴퓨터 켜고 끄는 법조차 몰랐어요. 환갑이 좀 지났을 때였나. 신용카드가 처음 나와서 은행에 만들러 갔더니 ‘할머니는 직업이 없어서 못 만들어요’라고 하더군요. 60세밖에 안 됐는데 다들 할머니 취급하니…. 결국 카드가 없으니 돈 뽑으려면 은행에 가야만 했죠. 인터넷 뱅킹이다 뭐다 하는 시대에 은행일 보려고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는 노인들 틈에 나도 껴있곤 했다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다시 젊어지셨어요.

“우리 영감 돌아가시고 한 10년은 친구들 만나고 여행가는 걸 낙으로 삼았어요. 일흔엔 노인정도 한번 나갔죠. 딸이 거기 가면 밥도 주고 친구도 사귈 수 있다며 하도 가보라고 채근해서. 그런데 아직은 내가 갈 곳이 아니더라고요. 거기 앉아서 노인들끼리 수다 떨며 시간 죽이느니 차라리 뭐라도 배우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세상은 휙휙 바뀌는데 나는 점점 바보가 되는 것 같았거든. 주민센터에서 인터넷을 가르쳐준다기에 수강 신청을 마친 뒤 동창들에게 ‘나 인터넷 배우러 가서 이제 모임에 못 간다’고 선언했어요. 그런데 막상 수업 들으러 갔더니 내가 제일 연장자더라고요. 내 다음이 예순다섯인가 그랬고.”

어렵진 않으셨나요.

“말해 뭐해.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딱 죽겠다 싶었죠. 그때 선생님이 우리 막내딸보다도 어렸거든. 내가 제대로 못 따라가니까 ‘어르신. 그냥 편히 사시면 안 되겠냐’고 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이미 주변에 소문을 다 내놨는데 도중에 포기하긴 싫더라고. 선생님께 ‘나는 꼭 배워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지. 3개월 과정인데 일주일 지나니 딱 절반만 남더라고요. 골치 아파 못 배우겠다고.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결석 한 번 안 하고 다녔죠. 1년을 그렇게 했더니 뭔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어요. 동영상도 만들어 가족 채팅방에 올리니 딸들이 ‘우리도 못하는 걸 어떻게 만들었어’라며 놀라는데 내심 뿌듯했죠.”

아흔이 가까워진 그가 인터넷 공부에 재미를 붙일 때쯤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모든 강의가 취소되면서 유씨의 발도 묶였지만 손까지 묶을 순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주민센터 강사에게 전화한 그는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려보는 건 어떠냐’는 조언에 곧장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섰다. 아이패드를 사기 위해서였다. “집 앞 대리점에 갔다가 퇴짜 맞고 전자상가까지 갔어요. 물어물어 애플 스토어까지 갔는데 또 홀대받고. 안 되겠다 싶어 ‘여기서 제일 좋은 거로 주쇼’ 해서 최신형 아이패드를 보란 듯이 사서 나왔죠.”

소싯적 그림을 그린 경험이 있으셨어요.

“중학교 다닐 때 한두 번 도화지에 ‘구래용(크레용)’으로 그려본 기억만 있어요. 우리 때는 예술은 배곯는 거라며 멀리하라고 했거든요. 그런 시절에 자랐으니 뭘 알겠어요. 남편이 평생 공무원 생활을 해서 시부모님 모시고 7남매 키우기에도 빠듯한 살림이었죠. 아이 둘이 대학 등록금을 동시에 내야 할 때는 연탄값도 모자라더라고. 돈 벌려고 미싱 공장 차려 수출도 해보고 건축일 배워 집을 지어 팔기도 했어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하며 참 열심히도 살았지.”

젊은 친구들도 태블릿 PC로 그림 그리는 게 결코 쉽진 않거든요.

“일단 사긴 샀는데 이건 뭐 어디 눌러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강사도 그림 그리는 건 잘 모르겠다며 유튜브 주소를 하나 보내줬어요. 그거 보면서 홀로 독학했죠. ‘일시 정지’만 수백 번 눌렀다니깐(웃음). 그런데 비싼 거 사놓고 딴소리 듣기 싫어서 ‘내 인생에서 이렇게 열중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공부에 푹 빠져 살았어요.”

SNS 올리는 건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집에서 혼자 그리기 연습하는 걸 손녀가 보더니 SNS에 올려보라는 거예요. 또 한참을 씨름해서 일단 가입은 했는데 그만 실수를 했지 뭐야. 성(姓)을 적는 칸에 성(性)을 쓰라는 줄 알고 ‘여(女)’라고 적고 이름 칸에 ‘유재순’이라고 적었죠. 다하고 나서야 ‘여유재순’이 된 걸 발견하고 ‘이거 망했구나’ 싶었는데 자꾸 보니 나쁘지 않더라고(웃음). 또 필명이라고 거창하게 여기저기서 불러주니, 지금은 오히려 듣기 좋아요.”

풍경을 그리려고 야외도 종종 나가세요?

“젊은 사람들처럼 여행도 가고 바깥에서 직접 풍경 보며 그리고야 싶죠. 그런데 아이패드는 고사하고 작은 손가방 하나 들고 나가는 것도 이 나이엔 힘에 부쳐요. 그래서 웬만하면 컴퓨터에서 좋은 풍경이나 이미지를 다운받아놓고 보면서 그리곤 하죠. 거실 탁자에 요렇게 앉아서 그리다 보면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간답니다. 그림에 몰두하다 보리차 끓이는 주전자도 벌써 두 번이나 태워 먹었다니까.”

그림의 색감이 무척 화려합니다.

“나이 들어 시력이 떨어지니까 옅은 색은 잘 안 쓰게 돼요. 그래서 더 짙은 원색 위주로 쓰다 보니 그림이 점점 화려해지더라고요. 얼마 전엔 무지갯빛 꽃을 그렸는데 화려한 그림일수록 손님들 반응도 좋은 것 같아요.”

도전하기엔 늦었다? 더 열심히 하면 그만

유씨의 SNS 계정을 찾는 손님 대부분은 그를 ‘할머니’라고 부르는 젊은 세대다. “할머니 그림 보고 용기를 얻습니다” “그림 덕에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등 매일 유씨의 그림을 보며 희망과 위로를 얻는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그가 지난 2월 카카오와 협업해 제작한 이모티콘도 ‘할머니 화가의 따뜻한 응원’을 주제로 했다.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떼 그림엔 ‘꿈의 날개로 더 높이 날아라’는 글귀가, 푸른 들판의 오솔길 풍경엔 ‘한 걸음씩 천천히 가도 돼’라는 위로의 메시지가 더해졌다.

유씨는 “어떨 때는 ‘너무 힘들어서 그만할까’라는 생각도 드는데, 댓글을 읽으면서 다시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곤 한다”며 “변변찮은 솜씨지만 내 그림이 손님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어 뿌듯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최근엔 아이패드를 새로 장만했다. 5년 가까이 쓰다 보니 잔 고장이 늘었기 때문이란다. 그는 “내가 그림 그려서 번 돈으로 사는 거라 큰맘 먹고 제일 좋은 거로 샀다”면서도 “5년이 채 안 된 기계도 이렇게 버벅거리는데 나는 90세도 넘었으니 몸이 말을 안 듣는 것도 당연하지”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여전히 활기가 넘치세요.

“젊어서는 자기 전에 늘 내일은 뭘 할지 계획을 세우면서 바삐 살았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일 할 일이 하나둘 사라지더라고요. 매일 특별한 일 없이 먹고 자는 ‘노인의 일상’이 나는 참 힘들었어요. 다리가 아파 조금만 걸어도 쉬어야 하고, 외출 한번 하려면 길을 달달 외우고 나가야 하는 것도 속상하고. 그래도 아직은 자녀들 도움받기 싫어서 병원도 혼자 다녀요. 의사 선생님이 깜짝 놀라요. 자식도 없이 혼자 접수하고 수납하는 할머니는 처음 본다고. 돌아보면 그림 그리기 시작하면서 이런 힘이 나는 것 같아요. ‘내일은 또 뭘 그리지’ 생각하면 희망이 샘솟거든요.”

도전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나를 봐요. 늦었지. 일흔만 됐어도 더 잘 그릴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죠. 처음엔 그래서 마음에 안 드는 그림은 올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냥 다 올려. 어쨌거나 열심히 그린 거니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의미가 있겠더라고요. 이젠 손가락 마디마디가 굳고 감각도 무뎌져 글씨 쓰기도 쉽지 않아요. 하지만 그림은 얼마든지 그릴 수 있답니다. 세밀하진 못해도, 선이 좀 튀어나가도 그림엔 ‘오타’가 없으니까. 손에 익은 대로 쓱쓱 그려질 때면 ‘늦었지만 도전하길 잘했구나’ 생각해요. 노인이라고 괄시받고 포기했으면 이조차 못했을 거 아니겠어요. 늦은 만큼 더 열심히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오늘 하루도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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