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민주센터 김덕룡 이사장 - 회고록 내는 마지막 YS 가신의 문민정부 비화

고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최측근이었던 김덕룡(84) 김영삼 민주센터 이사장은 수첩 대신 늘 링 달린 메모지 뭉치를 들고 다닌다. 4번이나 투옥되고 미행을 밥 먹듯 당한 군사 정권 시절의 후유증이다.
“아침에 나가면서 ‘오늘 밤에도 돌아올 수 있을까?’ 하며 집을 나갔죠. 수첩도 없었어요. 체포될 때 누군가 피해를 입어선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대신 전화번호 300개를 외우고 다녔고 일정은 나만 아는 암호로 쓴 메모지를 링에 끼워서 다니다 시간이 지나면 뜯어 버렸죠.”
그런 그가 반세기 정치역정을 기록한 회고록 초안을 다듬고 있다. 이르면 연말 출간 예정이다.
YS, 4시간 만에 김진영 날리고 하나회 일소했지만
‘군란’ 우려에 밤잠 설쳐…국방장관은 욕탕도 못 가
YS, 부인 국정개입 원천 봉쇄…단식조차 안 알려
과오 있지만 민주화와 ‘광주복권’의 공 기억돼야

“대개의 회고록처럼 자기 자랑에 그칠까 봐 망설였어요. 하지만 내가 활동한 민주화 운동 시대는 언론 통제로 ‘기록의 공백기’였던 만큼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지금 회고록을 쓰는 게 후대에 도움 되겠다고 여겨 결단했습니다.” 29세였던 1970년 신민당 의원 YS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김 이사장은 YS 비서실장과 2번의 정무장관·5선 의원을 지낸 최측근이자 상도동계의 좌장이다.
“경호실장이 매일 ‘밤새 군 동향’ 보고”
12·3 계엄 파동으로 YS의 하나회 숙청이 재소환되고 있습니다. 그때 비사부터 들려주시죠.
“YS는 대통령 취임 12일만인 93년 3월 8일 아침 7시 반에 권영해 국방부 장관을 불러 독대하면서 ‘오늘 김진영 육군 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을 교체하겠다’고 했어요. 권 장관도 처음 듣는 폭탄선언이었죠. YS는 놀란 권 장관과 바로 후임 인선에 착수해 비(非) 하나회 출신 김동진·김도윤을 임명하고 청와대에서 임명식을 마친 후 즉각 원대 복귀해 취임식을 열게 했어요. 4시간 만에 하나회를 숙청한 이 날을 언론은 ‘3·8 대첩’이라고 불렀죠. 이튿날 YS가 청와대 회의에서 ‘놀랬제?’라고 해 유행어가 됐는데 심지어 박관용 대통령 비서실장과 정종욱 외교안보수석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죠.”
누구랑 한 걸까요?
“그 질문을 많이 받는데, YS 단독으로 한 거예요. 왜냐하면 YS가 초선 의원 때부터 상임위를 국방위원회로 하면서 군을 잘 알았어요. 또 정승화 장군을 영입해 그로부터 군내에 하나회 같은 사조직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죠. 그래서 평소에 ‘이런 군은 그대로 두면 안 된다’는 생각을 나나 주변에 많이 얘기해왔어요.”
군의 반발은 없었나요?
“왜 없었겠어요. 권 장관은 온갖 위협에 시달린 탓에 매일 아침 가던 대중목욕탕도 한동안 못 다녔다고 해요. ‘신앙의 힘 아니었으면 못 견뎠을 것’이라고 내게 말하더군요. 청와대 경호실도 매일 밤을 새우면서 군 동향을 주시했죠. 당시 박상범 경호실장은 YS가 아침에 조깅하러 나갈 때 정세 보고를 했는데 1호 보고가 늘 ‘밤새 군 동향’이었어요. YS도 실시간으로 군 동향을 보고받느라 밤잠을 설쳐 푸석푸석한 얼굴로 출근할 때가 많았죠. 내가 고생하는 박 실장을 위로하러 저녁을 산 일이 있는데, 발렌타인 30년산을 들고 왔더군요. 처음 보는 비싼 술이라 놀랐는데 박 실장이 ‘새벽에 대통령께 군 동향 보고를 해야 하는데 입 냄새 나면 안 되니 이것 딱 한 잔만 마신다’고 하더군요. 32년 전 YS가 하나회를 척결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군에 사조직이 남아 쿠데타가 이어지고 12·3 계엄도 성공했을지 몰라요.”
YS의 보안 의식이 대단합니다.
“YS 최측근하면 누구보다 고 김동영 전 의원인데, 1990년 3당 합당 때 YS가 내게 실무를 맡기면서 ‘동영이한테도 얘기하면 안 된다’고 해요. 93년 8월 금융실명제 단행 때 내가 파라과이에 대통령 특사로 가게 돼 출국 인사차 청와대에 갔는데 YS가 ‘언제 가나’해서 ‘내일 갑니다’ 하니 ‘그럼 해외에서 그 소식을 듣겠네’라고 해서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는데 그게 금융실명제였죠. 측근인 내게도 꽁꽁 숨긴 거예요. YS는 83년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에 들어갈 때도 나와 의논하면서 ‘절대로 맹순이(부인 손명순 여사)에겐 얘기하지 말아라’고 했어요. 부인에게도 보안을 철저히 지킨 거죠.”

“YS, 노태우에게 안기부 문건 던져”
요즘 전 영부인의 국정개입 논란으로 시끄러운데 손 여사는 어땠나요?
“손 여사는 내조에만 충실했고 국정·공천 개입은 상상할 수도 없어요. 워낙 소문이 나 줄 대려는 사람도 없었어요. 고위공직자 부인들과 만나는 것조차 피해 영부인 5년간 구설 한 번 없었죠. 남편 일에 ‘관여’한 유일한 예외는 YS가 아들 현철씨 구속을 결단할 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항의한 겁니다. 그래도 YS는 단호하게 일축했죠. 그때 김기수 검찰총장이 나한테 전화를 했어요. ‘대통령이 제게 전화해 왜 현철이 빨리 안 집어넣냐고 호통을 치시는데 정말 그래도 괜찮습니까?’ 하길래 ‘대통령 뜻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답했죠.”
YS가 정권 잡는 계기를 만든 3당(민정당·민주당·공화당) 합당 실무를 맡았는데요.
“89년 어느 날 YS에게 황병태 당 정책위원장이 ‘저쪽(민정당)이 합당 논의를 하자고 합니다’고 전했어요. YS가 내게 ‘그들을 만나보라’고 해서 황병태와 함께 민정당 박철언 의원과 박준병 사무총장을 만나 2대2 비밀회동을 7~8번 하면서 합당 밑그림을 그려갔죠. 주로 저녁에 신라호텔에 방을 잡아 한 사람씩 들어가고 나오는 식으로 만났어요. 그런데 세 번째쯤 모임에서 박철언이 ‘내각제로 개헌하면 어떠냐’고 해요. 나는 ‘민주주의는 대통령 직선제 아니면 안 된다. 내각제 얘기 또 꺼내면 합당 논의는 끝이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어요. YS에게 보고하니 ‘맞다. 내각제는 절대 안 된다’고 하더군요. 박철언 측도 당황했는지 다시는 내각제 얘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3당 합당 뒤 “YS·노태우·김종필(JP)이 내각제 개헌 각서를 썼다”는 중앙일보 특종이 터졌는데요.
“깜짝 놀라 YS에게 ‘사실이냐’고 따지니 민망해하면서 ‘노태우 대통령 쪽에서 JP가 내각제 안 하면 전당대회 안 하겠다고 버티니 각서만 한장 써달라. 그럼 내각제를 일절 거론하지 않겠다’고 하길래 써준 것뿐이라고 해요. 이어 YS는 ‘각서를 절대 공개하지 않기로 해놓고 흘렸으니 정치 공작’이라며 당무를 거부하고 단호하게 마산으로 내려갔죠. 당시 박준병 사무총장 방에 우리 쪽 당직자가 들어갔는데 전화를 하고 있던 박 총장이 그 사실을 모르고 ‘드디어 YS가 묘혈에 들어갔다’고 말한 거로 보아 그가 언론에 흘린 거로 보입니다. 이뿐 아니에요. 내가 알고 지내던 안기부 핵심간부로부터 안기부가 YS 축출 구상을 담은 ‘김영삼 관리 방안’을 만들었다는 정보를 듣고 설득해 문건을 입수했는데 이걸 YS가 노란 봉투에 담아 청와대 주례회동에서 노 대통령 앞에 던지면서 ‘뒤에서 이런 짓이나 하는데 어떻게 정치를 같이해’라고 일갈했죠. 명백한 물증 앞에 노 대통령은 사과했고, 내각제 시나리오는 없어졌죠.”
“‘차떼기 대선’ 때 5억 주려길래 거절”
정치자금 스캔들도 그 시절 흑역사입니다.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이 대기업에서 불법자금 824억원을 수수한 ‘차떼기 사건’이 대표적인데요.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는데 당 사무총장이 보자고 해서 집무실로 갔더니 종이상자를 가리키며 ‘요긴하게 쓰시라’고 해요. ‘뭐냐’니까 ‘돈입니다’고 해요. ‘얼마요’하니 ‘5억’이라고 해요. 나는 ‘쓸데없는 짓 말라’고 일갈하고 방을 나왔죠. 나는 가난이 수치는 아니라고 생각해 왔고 YS와 정치 해오며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YS의 재산은 상도동 집 한 채와 물려받은 거제의 생가·선영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다 사회에 환원했죠. 40년간 그분과 지내면서 정치자금을 사적으로 챙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93년 8월 경부고속철도를 수주한 프랑스 테제베 대표가 청와대를 방문해 ‘국제적으로 공인된 커미션을 드리겠다’고 하자 YS는 단칼에 거절하며 ‘그만큼 공사비를 깎아 달라’고 했죠. 훗날 테제베 대표가 기자들에게 ‘아시아에 저런 대통령이 있다니 놀랍다’고 했답니다.”
국민의힘에서 툭하면 ‘5·18 폄하’가 터지는 현상도 YS를 재소환하는데요.
“YS는 호남을 배려하는 의지가 굉장했어요. YS 대선 당선 직후 쌓인 피로를 풀러 소백산을 찾았는데 YS가 급히 상경하라고 해서 올라가니 ‘호남 출신으로 교육부·체신부 장관, 국방부 차관 적임자를 찾으라’고 해서 수소문 끝에 오병문·천용택 씨 등을 추천했어요. 그 결과 문민정부 첫 내각은 영남 8명, 호남 6명으로 지역 안배가 잘 이뤄졌죠. YS가 대통령 된 뒤 첫 지방 출장지도 새만금이었어요. 또 그는 광주 학살 책임을 물어 전두환·노태우를 구속하고 5·18 특별법을 제정했으며 문민정부 5년간 호남 지역 성장률이 전국 평균보다 19.8% 높았다고 해요. 김영삼 대통령은 과오도 있었지만 30년 군사 권위주의 체제를 청산하고 불가역적 민주주의 시대를 연 점에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