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도부 전체를 욕 먹이려고 하는 겁니까.”
윤희숙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이 지난달 17일 당 대표를 뽑는 8·22 전당대회 룰을 ‘당원투표 80%, 국민여론조사 20%’에서 여론조사 100%로 바꾸는 혁신안을 당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 보고하자, 사방에서 면박이 쏟아졌다. 윤 위원장은 18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한 마디를 반박하면 열마디 면박이 돌아왔다. 쉽게 말해 다구리(몰매)였다”며 “옛친윤계 등 당 주류와 강성 당원의 눈치를 보는 지도부의 기류가 피부로 느껴졌다”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결국 윤 위원장이 내놓은 혁신안은 모두 사장(死藏)됐다.
집권 2년 11개월 만에 107석 무기력 야당으로 전락한 국민의힘의 위기를 전문가들은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한 대구·경북(TK)과 친윤계 등 주류 카르텔이 장악한 당의 폐쇄적인 문화가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상명하복 문화 ▶TK·영남 중심 사고 ▶다양성 상실 등을 문제로 꼽는 전·현직 의원들의 진단과도 같은 맥락이다.

김웅 전 의원은 그들만의 세상에 갇힌 국민의힘의 모습으로 2023년 7월 순직해병 사망 사건 때를 떠올렸다. ‘VIP 격노설’과 수사 외압 의혹이 제기되던 그해 9월, 그는 본회의장에서 만난 영남 중진 의원에게 “멀쩡하던 애가 죽어서 돌아왔다”고 아쉬움을 토로하자 중진 의원에게선 “우리 지역에선 그런 소리 안 한다. 그런 말 말라”는 반응이 돌아왔다고 한다. 다른 친윤계 의원은 “그 일로 군을 휘젓고 다니면 안보가 유지되겠나”라고 핀잔을 줬다. 이후 순직해병 사건은 ‘금기어’가 됐다는 게 김 전 의원의 설명이다.
A 전 의원은 2023년 10월 강서구청장 보궐 선거 직후 국민의힘 내부 분위기를 “지금 생각해도 황당하다”고 표현했다. 당시 윤석열 대통령은 김태우 전 강서구청장에 대한 광복절 특별사면을 단행했고, 김 전 구청장은 보궐선거에 다시 등판해 대패했다. 그는 “당연히 비공개 의총에선 반성이 나올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고 했다. A 전 의원에 따르면 한 친윤계 의원은 “부정선거란 말도 돈다”고 읊조렸고, “거긴 민주당 텃밭 아니냐. 송파구청장 선거였다면 이겼다”고 말하는 의원도 있었다고 한다. 몇몇 의원이 “패배 원인을 복기하자”고 했지만 친윤계와 중진들은 “이럴 때일 수록 민주당과 맞설 대오를 유지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는 “실망한 의원 몇 명이 박차고 나간 뒤 의총장은 ‘원팀’을 외치는 단합행사처럼 끝났다”고 말했다.
국민의힘에 왜 이런 분위기가 고착화된 걸까. 야권 관계자는 “주류 60~70명만 똘똘 뭉치면 각종 외풍에도 정치 생명에 지장을 받지 않고 버틸 수 있다는 영남·주류 의원들의 사고 방식이 작동한 탓”이라고 분석했다. 한 수도권 의원은 “일부 의원들 사이에선 당이 어떤 비판을 받든지 지역구만 바라보고 주말에 경조사만 열심히 돌면 장수할 수 있다는 식의 인식이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의힘이 107석으로 쪼그라들면서 지역구 의원 89명(비례대표 포함 107명) 중 영남 의원 비율이 65.2%(58명)에 달하게 되면서 이런 분위기는 한층 강화됐다는 평가다. 반면에 2008년 총선에서 81석, 2012년 총선에서 43석이던 수도권 의석은 현재 19석에 불과하다.

초선 의원(43명) 중 상당수도 이런 당 기류에 편승했다. B 의원은 “윤 정부 출범 뒤 초선 카톡방에서는 내부 비판이나 건설적인 토론이 거의 사라졌다”고 꼬집었다. 그는 “일부가 비판적 목소리를 내면, 곧장 친윤 핵심에게 내용이 다 보고됐다”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대다수 초선 의원은 윤 정부의 문제점이 불거질 때마다 몸을 사렸다”고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초선 카톡방은 정부나 의원들의 홍보·선전물만 올라오는 홍보방이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사실상 공천권을 쥔 윤 대통령과 친윤계의 선택을 받아 국회에 입성한 초선 의원들이 애초부터 쇄신보단 주류를 거드는 쉬운 길을 스스로 택했다는 지적도 있다. 국민의힘 중진 의원은 “과거 한나라당 시절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은 내부 쇄신을 외치며 ‘정풍 운동’을 주도했고, ‘민본 21’ 등 소장파 모임은 2010년 지방선거 패배 이후 이명박 정부 쇄신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돌렸다”며 “지금 우리 초선 중에 그런 모습을 보인 의원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