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목소리의 문턱 앞에서

2025-08-18

2019년 8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지명 이후의 극단적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최근 광복절 특별사면은 이 갈등을 재점화했다. 당시도 지금도 조국 사태를 둘러싼 논의 지형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고, 당시 겪었던 여러 겹의 계급적 장벽이 건재하다는 걸 확인한다.

그 장벽은 담론들 사이에 놓여 있다. 우선 조국 사태의 성격을 위선과 ‘내로남불’로 규정하는 건 조국과 민주진영을 ‘위선자’로 만드는 걸로 족한 정치 공세다. 이 논리는 개인의 도덕성을 초점으로 삼기에 구조적 불평등에 침묵한다. 더욱이 위선을 강조할수록 차라리 뻔뻔하고 노골적인 악이 낫다고 여기게 한다는 점에서 위험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론 중 하나는 입시 부정과 조작이 “관행이었다”는 것이다. 그 논리는 위선마저 걷어낸 뻔뻔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존재하고 작동하는 교육 불평등을 관행이라고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를 비판하는 청년의 목소리는 ‘불공정’이란 단어로 집약됐다. 입시 경쟁이라는 게임의 룰을 위배하고 반칙을 썼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 입시에 매달린 세대의 유년기 자체가 부정당한다는 감각이 있다. ‘공정 담론’은 특권과 반칙을 문제 삼으며 “관행”을 운운한 기성세대를 비판했다. 그러나 공정을 외친 청년이 주로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대생’에 국한되는 한계가 있었음에도, 공론장에서 공정 담론은 청년 전체의 목소리로 과잉대표되었다.

사실 당사자의 말이라고 꼭 올바르거나 순수한 것은 아니다. 정치와 미디어가 ‘이해할 수 있는’ 말만 청년의 목소리로 채택되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은 배제된다. 어떤 부모는 자녀의 대학 과제를 도와줄 수 있지만,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고지서나 공문 내용을 설명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어떤 대학생이 경력을 쌓고 인맥을 만드는 동안, 어떤 대학생은 알바로 생활비를 벌며 4년간의 등록금 빚을 안은 채 졸업한다. ‘비명문대생’, 대학을 가지 않거나 중도 포기한 청년들에게 조국 일가의 모습은 그야말로 ‘딴 세상’이었다. 지방의 노동계급 가정에서 자라 동시대에 입시를 치른 나 역시 전혀 알지 못했던, 아무도 알려주지 않던 세상을 조국 사태로 알게 됐다.

여기에 계급적 장벽, 목소리의 문턱이 놓여 있다. ‘공정’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 현격한 불평등을 정치와 미디어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이는 정치와 미디어가 얼마나 계급적으로 편향되어 있는지 알려준다. 정치와 미디어에 종사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좁은 세계 바깥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불공정을 말하는 청년을 향해, 혹자는 ‘너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언급하며 비난과 부정의 근거로 삼는다. 간신히 새어 나온 목소리를 탈취해 정치 공세에 이용하는 것은 다시 한번 그 목소리의 주인을 지워버리는 폭력일 뿐이다.

조국 사태 당시 가뭄의 단비가 내린 순간이 있었다. 경향신문은 ‘광화문과 서초동 사이’라는 기획 연재로, 목소리의 문턱을 넘지 못한 이들에게 지면을 할애했다. 열 편의 글은 공정 담론과는 달리 노동자,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의 목소리를 내며, 문턱 바깥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증언했다.

흥미롭게도, 이 기획에 담긴 목소리들은 지난겨울 광장에서 크게 분출했다. 계급적으로 편향된, 진영 간 대결의 정치에서 밀려난 시민들은 정말로 목소리 낼 곳이 필요했다. 자유발언을 통해 기존의 공적 언어에 없던, 절박하고 아름다운 말들이 쏟아졌다. 그들은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마이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 파면 이후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자 목소리는 또다시 문턱 바깥으로 밀려났다.

목소리의 부재는 존재의 흔적이 말소되는 것과 같다. 내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아파한 사람들이 여러 겹의 문턱 앞에 무너지는 걸 본다. 그 장벽을 향해, 나는 이 지면으로 계속 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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