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팬덤 정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배적 해석은 이렇다. 첫째, 팬덤 정치는 특정 정치인을 추종하는 ‘지도자 현상’이다. 둘째, 팬덤의 지지는 맹목적이다. 셋째, 팬덤 리더는 ‘○통’, 팬덤 대중은 ‘○빠’, 이를 추종하는 의원들은 ‘친○’로 불리는데, 이들 ‘○통-친○-○빠’ 사이의 관계는 견고하다. 팬덤 정치를 이렇게 이해해 온 이들에게 민주당 대표 경선 결과는 의외였다.
정청래의 승리는 ‘이통’(이재명 대통령)이 원했던 일이 아니었다. ‘이통’은 박찬대를 원했고 의원들의 압도적 다수는 ‘통합 친명’으로 선거운동을 했다. 결과는 팬덤 당원이라 불리는 이들이 결정했다. 지금껏 그들은 이재명 당 대표와 이재명 대통령을 만드는 데 헌신했었다. 그런 그들이 이번엔 이 대통령의 의중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선택을 했다. 팬덤 정치로부터의 이탈일까, 아니면 팬덤 정치의 전형적인 특징인가.
팬덤, 지도자 현상 아닌 대중 현상
정치인을 도구로 삼는 대중운동
이번에는 친명 무시, 정청래 선택
늙어가는 팬덤 정치 미래 있을까
팬덤 정치는 지도자 현상이 아니라 ‘대중 현상’이다. 정치인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을 도구로 활용하는 ‘특별한 대중운동’이 팬덤 정치다. 팬덤 대중은 정치 참여의 효능감을 즐기는 특별한 시민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치를 보고 자신들에게 의존하는 정치인을 원하지, 자신들을 단순 지지자나 소극적 추종자로 여기는 정치인을 원하지 않는다. ‘○통’이나 ‘친○’으로 불리는 팬덤 정치인들이 팬덤 대중의 ‘주인’이 아니라 ‘포로’인 측면이 더 크다.
팬덤 정치의 주인공은 대중이지 정치인이 아니다. 그런 팬덤 대중이 참여의 효능감을 높이는 수단으로 ‘발견’한 것은 ‘혐오’가 갖는 놀라운 힘이다. 그들은 선호가 아니라 혐오의 방법으로 행동한다. ‘수박’처럼 낙인을 찍고 ‘두려움’을 부과할 때 자신들의 존재감이 커지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혐오의 대상을 ‘비문’에서 ‘친문’으로 옮긴 때가 있었는데, 그때 오히려 위력이 더 컸다. 과거 친문의 그런 처지를 이제 친명이 잇고 있다.
팬덤 대중은 자신들이 권력을 만들고 또 버릴 수 있음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적극적 시민’이다. 그들은 독립 변수이지 종속 변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팬덤 대중은 자부심이 강하다. 국민의힘 쪽 팬덤은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산업화를 일궈낸 것을 한국사회가 알아주길 바란다. 민주당 쪽 팬덤은 1980~90년대 그들이 발산했던 민주화와 통일 운동 덕분에 오늘의 한국사회가 있음을 입증하려 한다. 여야 어느 쪽이든 팬덤 대중은 존재감을 보여주려 하지, 따르고 추종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순응적인 참여자가 아니다. ‘비판적 대중’이다.
팬덤 대중은 성격이 강한 정치가를 좋아한다. 권력의 보조자 역할을 하는 평범한 의원들은 무시한다. ‘친문’을 ‘수박’으로 만들어 조리돌림 할 때의 쾌감을 즐겼던 그들이 무기력한 박찬대나 이제는 별 특색이 없어진 친명 의원들을 좋아할 리 없다. 정청래는 달랐다. 그는 ‘야당 없는 민주주의’, 그 흥분되는 싸움판에 자신들을 초대했다. 싸움을 원하는 팬덤 당원이 그런 정청래에게서 새로운 기회를 찾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청래와 팬덤 당원의 결합은 서로의 전략적 선택이므로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팬덤 정치는 유동적이다. 친문이 ‘수박’ 취급을 당하고 이제는 친명이 무시되듯, 계속 변할 것이다. 팬덤 정치만 그런 게 아니라 지금 한국 정치가 극도로 불안정하다. 정당들은 우리 사회의 중대 갈등을 두고 씨름하지 않는다. 오로지 누가 당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이 되느냐를 둘러싼 싸움만 있다. 이제는 신념의 힘을 견지하는 정치가를 찾기가 어렵다. 팬덤 정치가 정치를 망친 게 아니다. 정치가 망가졌기 때문에 그 결과로 위세를 떨치게 된 것이 팬덤 정치다. 그러니 팬덤 정치라도 있어서 ‘의외의 재미’라도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개딸’이라는 명칭과는 달리, 우리 사회에서 정치에 대한 열정이 가장 큰 대중 집단은 ‘나이든 남성’이다. 논란이 되는 정치 기사에 인터넷 댓글을 다는 이들을 보라. 85%가 남성이다. 국민의힘 쪽은 60대 이상이, 민주당 쪽은 50대가 중심이다. 2023년 민주당의 ‘김은경 혁신위’는 권리당원의 영향력을 높여야 한다며 그 숫자를 245만 명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신뢰할 수 없는 숫자였다.
그해 민주당이 선관위에 신고한 당원 수는 513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권리당원 수는 150만 명이었다. 이번 당 대표 선거에서 권리당원은 111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정청래는 42만 표를 얻었다. 권리당원 혹은 팬덤 정치의 열정은 ‘K민주주의’로 상찬될 만큼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들은 젊지 않다. 앞서 언급한 2023년 자료에서 20대 권리당원은 6%인데 반해 40대 이상이 이미 72.5%였다.
한국 정치도, 팬덤 정치도 늙어가고 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은 사라져가는 세대가 붙잡고 있는 과거의 영광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보여주고 말 현상인지 모른다. 팬덤 정치에 미래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박상훈 정치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