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해관(사진)은 난공불락이었다. 남쪽으로는 바다를 북쪽으로는 산맥을 끼고 있었다. 여진족을 통일하고 명나라를 벌벌 떨게 한 누르하치도,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단번에 굴복시킨 홍타이지도, 그 벽을 넘지 못했다. 명나라 장군 원숭환이 요동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1630년 명나라 황제 숭정제는 원숭환에게 역모 혐의를 물어 처형해버렸다. 반란군을 이끌던 이자성은 1644년 베이징을 점령했고 숭정제는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홍타이지의 이복동생인 섭정 도르곤이 그 틈을 노려 베이징 정벌에 나섰다.

원숭환의 뒤를 이어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는 진퇴양난의 처지였다. 이자성의 군대 또한 베이징을 넘어 산해관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망한 명나라를 위해 싸울 수는 없다. 이자성의 편에 설 것인가, 도르곤에게 문을 열어줄 것인가. 오삼계는 후자를 택했다. 학계에서는 이를 ‘입관(入關)’이라고 칭한다.
1644년 5월 27일 화살 한 발 쏘지 않고 산해관에 입성한 청의 팔기군은 오삼계의 명군과 함께 이자성의 반군과 맞섰다. 명청 전쟁의 마지막 변곡점, 산해관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청나라는 베이징을 점령하고 중원의 지배자가 되었다.
산해관은 함락되지 않았다. 명나라 장수 오삼계의 손에 스스로 열렸다. 이것은 돌발적인 전개가 아니었다. 명나라 조정이 원숭환을 처형했을 때 이미 예정된 결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도탄에 빠진 백성의 삶은 안중에도 없이 권력 투쟁에 함몰되어 서로 헐뜯고 중상모략하는 나라,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장수를 스스로 제거해버리는 나라를 누가 목숨 걸고 지키려 한단 말인가. 명나라는 이렇게 무너졌다. 내부의 정치적 갈등에 정신이 팔려 외부의 위협을 방치하거나 오히려 키우는 어리석음은 지금도 반복되는 것이 아닐까.
노정태 작가·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