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의 열쇠 ‘염모재 장군 지석’ 최초 공개

2025-05-20

한국 고대사 복원의 중요한 열쇠가 될 고구려 지석(誌石)이 최초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주인공은 고구려 장군 염모재(冉牟在). 지금까지 정체가 불명확했던 모두루 묘지명의 핵심 인물이자, 광개토대왕 시기의 고위 장군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번에 발견된 염모재 지석은 단순한 고고학적 유물이 아니다. 이는 광개토대왕비와 나란히 서야 할 수 있는 ‘고구려 국가문서의 1차 자료 실물이자, 고구려사 해석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문헌적 실체’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 수십 년간 해석되지 않았던 모두루 묘지명(墓誌銘)의 미공개 구간을 해독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함으로써, 학계의 오랜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 지석은 고구려 귀족 염모재의 생전 행적과 가문 계보, 광개토대왕과의 관계, 북부여 이주 과정 등을 치밀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모두루 묘지명의 첫 문장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고 일치하는 내용이 지석의 첫 면에 등장한다. 이는 곧, 지금까지 학계에서 논란이 이어졌던 “모두루와 염모재의 관계”를 명확히 손자와 할아버지로 확정짓는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모두루 묘지는 1935년 중국 집안시에서 발견됐으나, 오랜 시간 침식과 훼손으로 인해 800자 중 약 250자만 판독 가능했다. 이후 해석이 불가능했던 대목들은 학자 간의 추정과 논쟁만을 남겼다. 염모재 지석의 공개는 이러한 해석 불능 상태를 실증적으로 뒤집은 결정적 전환점이 된다.

지석은 4면에 걸쳐 정제된 문체로 제작되었으며, 광개토대왕비와 문장 구성, 서술 방식, 마무리 구조까지 유사성을 갖고 있다. 다만 광개토대왕비의 글 ‘자(者)’로 문장을 끝맺는 반면, 염모재 지석은 ‘석(昔)’이라는 글자로 마감한다는 차이점이 눈에 띈다. 이는 고구려 내부 문서 체계의 위계나 작성 시기의 차이를 보여주는 1차 자료로서도 가치가 있다.

1935년 중국 학자들은 모두루 묘를 여러 세 대(代) 인물의 공동묘로 해석했지만, 일본 학계는 단일 묘소설을 주장했다. 이후 1994년, 묘지 주변에 홍수가 발생하면서 습기에 의해 새롭게 드러난 글씨들이 발견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 학자 경철화는 일본 측 해석에 무게를 실었다.

그러나 이 지석의 등장으로, 그동안 학자들의 해석을 제한지었던 결락된 구간이 완전히 드러났다. 더는 추측에 의존하지 않고 문헌적 실증으로 해석을 확정할 수 있는 최초의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번 염모재 지석 공개는 단지 역사학계의 사건이 아니다. 국가 차원의 문화자산 복원 전략이 필요하며, 후대 교육 자료로도 적극 활용돼야 한다. 광개토대왕비 이후 이처럼 실증적인 고구려 사료는 100년 만에 처음이다.

그리고 이 역사적 첫 공개는, 고구려문물연구소(소장 이완식)가 주관한 고구려문물포럼을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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