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영화, 연극, 뮤지컬, 웹툰 등 재미있는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만 소비하기에는 뭔가 부족함을 느낄 때가 없던가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읽을거리가 더해진다면 훨씬 더 재밌을 지 모릅니다. ‘일타쌍피 스토리노믹스’는 이야기에 플러스 알파를 더하는 경제인문학 콘텐츠입니다.
챙이 넓은 중절모, 뺨과 얼굴을 가리는 코트 깃, 긴팔의 두꺼운 코트와 장갑, 핑크빛 뾰족한 코, 푸른색 고글안경, 흰붕대로 감은 얼굴, 그리고 붕대사이로 비쳐나온 두꺼운 검은 머리칼.

투명인간하면 떠오르는 이 이미지는 영국의 소설가 허버트 조지 웰스로부터 시작됐다. H.G 웰스는 1897년 소설 <투명인간>을 통해 투명인간의 정형을 만들어냈다. 지난 120여년간 투명인간은 연극, 영화, 뮤지컬, 만화 등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며 많은 스토리를 창작하는데 기여했다.
시간여행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타임머신>, 외계인의 지구침공을 그린 <우주전쟁> 등도 H.G 웰스의 작품이다. 그가 ‘공상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은 이때문이다.
소설 <투명인간>은 2월초 폭설이 내린 어느날, 세찬 눈보라를 뚫고 영국의 작은 마을 아이핑에 수상한 낯선 남자가 나타면서 시작한다.
챙넓은 중절모를 푹 눌러쓴 채 코끝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붕대로 빈틈없이 가린 이 남자는 <역마차>라는 여관에 머문다. 여관 여주인은 큰 사고를 당해 붕대를 둘둘 감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매일같이 방에 쳐박혀 정체불명의 실험을 하는 그를 보며 점차 의심이 커진다. 때마침 목사관이 절도를 당하고, 여관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면서 이방인은 마을사람들과 갈등을 빚는다.
“내가 누군지 보여주지” 마침내 붕대를 풀어버린 그의 옷 속은 텅비어있다.

투명인간은 실체는 30대 젊은 과학자 그리핀이다. 키 180cm의 건장한 청년인 그는 대학 재학 시절 화학상을 받을 정도로 재능있는 의학도 였다. 그는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면서 빛에 매료된다.
세상을 깜짝 놀래키는 큰 과학적 업적을 내고 싶었던 그는 빛의 굴절률을 조절하면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핀은 열정적으로 광학농도를 연구에 뛰어들고 마침내 혈액과 세포조직을 투명하게 하는 법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약을 제조해 스스로 투명인간이 된다.
H.G웰스가 <투명인간>을 집필하던 19세기 후반은 과학의 시대였다. 각종 물리현상이 발견되고, 해부학적, 생물학적 진보가 급격히 이뤄졌다. 당시 몸을 관통할 수 있는 뢴트겐의 X선 발견도 H.G웰스가 <투명인간>을 집필하는 데 영감을 줬다.
실제 소설 속에서 신체를 투명하게 만드는 법을 설명하다가 “내 발견은 뢴트겐 진동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내 발견외의 다른 점을 설명하고 있는 지는 모르겠다”는 언급이 나온다. 결국 당시의 의학, 물리학, 생물학적 지식을 엮어 만든 캐릭터가 투명인간이라는 의미다.
그리핀에게 투명인간은 개인적 성취를 넘어 유토피아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는 보이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웅대한 비전들과 신비로움, 능력, 자유로움을 갖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로인한 결점은 없다고 봤다.
인류는 오랫동안 장애, 고통, 질병, 노화, 죽음 등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강화하는 방법을 연구해 왔다. 19세 이후 빠르게 진전된 과학의 발전은 이같은 꿈을 현실화시켰고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을 탄생시켰다.
트랜스휴머니즘이란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과학기술로 향상시키려는 철학적, 사회적 운동을 말한다. 쉽게 말해 인간이 지금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 진화할 수 있다고 믿고 이를 기술로 실현하려는 노력들을 말한다. 과학기술을 이용해 강화된 인간을 트랜스휴먼(Transhuman)이라고 부른다.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영국의 생물학자인 줄리언 헉슬리다. 그는 1957년 에세이 <트랜스휴머니즘>을 통해 “인간은 원한다면 스스로를 진화시키고 초월할 수 있다”며 “다만 그것은 휴머니즘 가치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재밌는 것은 줄리언 헉슬리와 H.G웰스와의 관계다. 줄리언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쓴 올더스 헉슬리의 형이다. 두 형제의 할아버지는 생물학자인 토마스 헉슬리인데 그가 H.G웰스의 스승이었다.
토마스 헉슬리는 ‘다윈의 불독’이라 불릴 만큼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적극 옹호했던 생물학자로 영국 런던의 노먼 스쿨에서 H.G웰스에게 생물학을 가르쳤다. H.G웰스의 진화론적 세계관, 과학적 사고방식, 인간본성에 대한 탐구는 스승인 토마스 헉슬리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H.G웰스는 “토마스 헉슬리는 나의 정신적 아버지와 같았다”고 회고했다.
인생을 걸고 연구한 성과였지만, 그리핀의 생각과 달리 투명인간은 축복을 주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족쇄가 됐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맨몸으로 다녀야 하는데, 옷과 신발없이 추위와 더위를 견딜 수는 없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달려오는 마차는 생명에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그리핀은 투명인간이 되는 것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어리석은 짓이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는다. 그리핀은 말한다. “이 미친 실험을 하기전 나는 수천가지 이점을 꿈꿨지만 투명인간 된 이후에는 그 모든게 단점으로 보였다”고.
그리핀이 아이핑의 한 여관을 찾은 것은 투명인간을 되돌리는 연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연구를 담은 노트까지 잃어버리면서 원래대로 돌아올 길이 사라져 버린다. 이성을 잃어버린 그리핀은 투명인간의 힘을 빌어 마을을 지배하려는 꿈을 꾼다. 명령에 순종하지 않거나 방해하는 자는 모조리 죽이는 공포정치를 펴겠다고 벼른다.

소설 <투명인간>은 단순한 SF소설이 아니다. 과학적 발견이 욕망과 결합될 때 초래할 수 있는 위험과, 권력의 남용이 어떻게 인간성을 파괴하고, 사회적 고립이 어떻게 개인을 파멸로 이끄는 지를 경고한다. 인공장기를 이용해 생명을 연장하고, 뇌와 컴퓨터를 연결해 인지능력을 높이고, 유전자를 편집해 질병에 강한 신체를 만든 것이 점점 가능해져가고 있는 지금 소설 <투명인간>은 여러가지 질문을 던진다.
유토피아 vs 디스토피아
철학자 닉 보스트롬 등은 1998년에 발표한 ‘트랜스휴머니스트 선언(Transhumanist Declaration)’을 통해 인간의 신체적·정신적 능력은 기술의 도움을 받아 한계를 초월할 수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인류를 ‘포스트휴먼’ 상태로 진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포스트휴먼(posthuman)은 기술적으로 트랜스휴먼보다 더 진보한 단계로 사실상 인간을 넘어선 존재다. AI인격체 처럼 육체나 의식이 디지털, 가상공간 등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신의 넘어서는 기술의 진화는 심각한 윤리적, 철학전 논란을 낳을 수 밖에 없다.
로널드 베일리는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해 “대담하고 기발한 이상적 열망이 담긴 운동”이라고 반겼다. 반면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사상”이라고 우려했다. H.G웰스의 <투명인간>이 보는 트랜스휴머니즘은 후자에 가깝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