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는 쉬워도 읽기는 고역....명사만 넘치는 문장에 생기 더하려면[BOOK]

2025-05-09

단어 옆에 서기

조 모란 지음

성원 옮김

위고

"문장의 진부함을 측정하려면 그 안에 있는 명사를 세어보면 된다."(94쪽)

명사가 무슨 죄가 있길래. 그러면서도 내심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은이 말마따나 "'진실', '권력', '지식' 같은 추상명사만이 들어간 주장은 흥미를 끌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

그렇다고 추상명사가 좋은 문장의 적은 아니다. 지은이는 '추상의 사다리'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가장 아래 단에 의자·벽·손·발 등 구체적 명사가, 가장 위 단에는 추상명사가, 중간에는 그사이의 단어가 있는 사다리다. 문장의 단어가 이런 사다리의 특정 단에만 머물면 글이 단조로워진다는 얘기다.

명사를 줄줄이 이어 붙인 문장은 쓰기는 쉬워도 읽기는 고역이라는 게 지은이의 지적. 이런 문장에 생기를 불어넣는 방법으로 동사를 쓰라고 권한다. 하지만 동사나 형용사 대신 명사화된 단어는 경계 대상. "X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대신 "X의 기능 손실이 발생했다"고 하는 식이다. 지은이는 이런 글은 "글쓰기가 응당 그래야 하듯 독자의 반응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을 차단해버린다"고 비판한다.어쩌면 그런 의도로 쓰는 것일지 모른다. 책에 나오듯, 예루살렘 재판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달리 아이히만이 "난해한 단어들을 방패막이로 썼"던 것처럼.

이 책은 글쓰기 중에도 단어와 문단을 아울러 문장이 초점. 영국의 사회문화사학자이자 영어·문화사 교수인 지은이는 단호한 지침을 주는 대신 문장에 대한 여러 사람의 고민과 그 자신의 사유를 다채롭게 풀어낸다. 덕분에 셰익스피어가 동사를 얼마나 잘 활용했는지, 16세기 화형당한 신학자 윌리엄 틴들이 얼마나 강렬하고 깔끔하고 풍부한 영어로 성경 번역에 공을 들였는지 등도 알게 된다.

간결한 문장만 미덕으로 삼는 대신 문장의 길이에 따른 리듬을 강조하고, 마침표가 문장의 끝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장의 시작이란 점을 부각하는 것도 눈에 띈다. 지은이는 과잉정보도 경계한다. 뛰어난 디자인은 문의 손잡이를 당겨야 할지 밀어야 할지 사용자가 설명문 없이도 알게 한다. 디자인이 잘 된 문장 역시 그렇다는 것.

한글과 다른 영문 글쓰기를 다룬 책이지만 학술논문, 광고카피, 언론기사, 사용설명서, 안내문 등 문장 쓰기를 반복하고 고심하는 이들이 스스로의 생각을 가다듬는 데 도움이 될 만하다. 글쓰기는 독자를 배려하고, 마음을 쓰는 일이라고 여기는 지은이가 문장에 대한 애정을 담은 '문장 연서'이기도 하다. 원제 First You Write a Sent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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