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비 한도 풀어 방위산업 다각화… 제조업도 ‘생기’ [세계는 지금]

2025-05-31

독일 재무장 정책 가속

메르츠 총리 “독일이 돌아왔다”

러·우크라전쟁… 트럼프 방위비 압박…

독자적인 방위역량 강화 필요성 고조

국방·사회인프라 지출 확대 개헌 통과

방산 투자 → 경제 활력 ‘선순환’

KNDS, 열차공장 인수… 고용창출 효과

일반 中企들, 군사 분야로 업종 전환도

지정학적 불안에 ‘무기제조 금기’ 해제

“독일이 돌아왔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의 선언은 자국의 안보 자강을 위한 기초를 마련했다는 자신감, 혹은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총리 취임 전 자신의 주도로 정부의 국방 관련 지출을 대폭 늘릴 수 있도록 헌법 개정을 합의한 이후였다. 국방 분야에 대한 정부의 대규모 지출이 시장에 유입되면서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는 선순환의 기폭제가 될 것이란 기대도 커지는 상황이다. 방위산업을 발판으로 도약을 노려보는 기업이 많아졌고, 관련 일자리도 증가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국방 지출 제한 없앤 헌법 개정

중도우파 성향의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으로 집권한 메르츠 총리는 총리 취임 전인 지난 3월 사회민주당(SPD)과 녹색당을 설득해 경제 체질 개선, 안보 강화를 위해 국방 분야 지출과 사회 인프라 지출을 대폭 확대하는 기본법(헌법) 개정안을 찬성 513표·반대 207표, 재적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이로써 최장 12년간 인프라 예산만 5000억유로(약 780조원)를 투입할 수 있게 됐다. 4657억유로(약 726조원)였던 지난해 연방정부 전체 예산을 넘어서는 규모다. 국방 분야 지출도 사실상 무제한 확대가 가능해졌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듬해 정부의 신규 부채를 연간 국내총생산(GDP) 대비 0.35%로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었는데, 이번 개정안으로 국방비는 부채 제한 규정을 적용받지 않게 됐다. 기본법 개정은 독일 정부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정규 예산과 별도로 2027년까지 특별예산 1000억유로(약 156조원)를 투입하는 등 지난 몇 년간 국방력 강화를 위해 취해 온 조치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국방장관은 지난 24일(현지시간) “지원자보다 필요한 인력이 더 많은 시점이 오면 징집을 결정할 수 있다”며 징병제 부활도 시사했다.

독일이 국방 분야에서 파격적으로 재정 지출을 늘려 온 배경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고조된 안보 불안, 장기화된 경기 침체라는 이중의 위기 상황이 자리하고 있다. 소련 해체 이후 유럽과 러시아는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해 왔고 독일은 군비 지출을 줄여 복지, 경제 분야에 예산을 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판이 바뀌었다. 러시아는 독일을 노릴 수 있는 직접적인 군사 위협이 되어 독자적 방위 역량을 키워야 하는 필요성이 증가했다. 게다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방위비 분담을 늘리라는 압박을 높이면서 더 이상 미국에 안보를 기대기만 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지난 15일 나토 회원국이 직접 군사비로 GDP의 3.5%를, 인프라 및 사이버 보안 등 광범위한 안보에 GDP의 1.5%를 할애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요한 바데풀 독일 외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했던 5%를 따를 것”이라며 뤼터 사무총장의 제안에 동의했다.

경제 상황도 심각해졌다. 러시아로부터 값싼 천연가스를 수입하지 못하게 되자 제조업의 경쟁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철강, 화학 등 에너지 집약적 산업의 생산비용이 상승하고, 기업들은 생산기지를 외국으로 이전했다.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DW)의 보도에 따르면 독일을 대표하는 자동차 제조사 폭스바겐은 지난해부터 독일 내 공장 10곳 중 3곳을 폐쇄해 일자리 수만 개가 줄었다. 직원들의 급여를 10%씩 삭감하는 구조조정에도 나섰다. DW는 2019년 이후 자동차 업계에서 일자리 약 4만6000개가 사라졌다고 전했다. 힐데가르트 뮐러 자동차산업협회(AHA) 회장은 DW와의 인터뷰에서 “향후 10년 동안 자동차 산업에서 14만개의 일자리가 추가로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방산업체, 인력·시설 확충에 일자리도 증가

안보 자강을 위한 독일 정부의 지출 확대가 침체된 경제에 활력소가 되고 있는 신호는 여기저기서 확인되고 있다.

17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작센주 괴를리츠의 한 열차 공장은 열차 제조업체 알스톰이 저임금을 쫓아 다른 국가로 생산시설을 이전하면서 폐쇄됐지만, 지난해 말 독일·프랑스 합작 방산업체 KNDS가 인수했다. KNDS는 공장 직원 700명 중 약 350명을 고용하고, 내년부터 레오파드Ⅱ 주력 전차, 푸마 보병전투차량의 부품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지난 2월 괴를리츠 공장에서 열린 인수 기념식에서 플로리안 호헨바터 KNDS 최고경영자(CEO)는 “(기존 공장이) 최고 품질의 부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숙련된 용접공들을 이미 보유하고 있다”고 인수 이유를 밝혔다. 옥타비안 우르수 괴를리츠 시장은 “다른 도시들도 곧 현재 괴를리츠에서 일어나고 있는 산업 전환을 겪을 수 있다”며 “재무장에 따른 대규모 투자가 유입됨에 따라 산업 현장에 이러한 종류의 변화가 계속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KNDS의 괴를리츠 열차 공장 인수에서 보이듯 방산업체들의 몸집 불리기는 고용창출로 이어질 수 있다. 지난 3년 동안 총 1만650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해 직원이 40% 이상 증가한 라인메탈, 디엘 디펜스, 티센크루프 마린 시스템, MBDA는 2026년까지 약 1만2000명을 더 채용할 계획이다. 아르민 파퍼거 라인메탈 CEO는 “독일 납세자의 돈을 안보를 위해 사용한다면 독일에서도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며 자동차 공장을 새로 인수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혔다. 지난달 파퍼거 CEO와 라인메탈 대표단은 가동 중단 예정인 북서부 오스나브뤼크 폭스바겐 공장을 방문해 인수 가능성을 타진했다. 라인메탈은 독일 최대 자동차 공급업체인 콘티넨탈과 보슈에서 해고된 약 300명의 근로자를 고용하기로 약속했다.

◆일반 기업, 방산업체로 변신시도

일반 기업들이 자사가 가진 기술을 군사 분야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업종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은 눈에 띄는 대목이다.

트랙터, 굴착기 및 기타 중장비용 엔진을 생산하는 161년 역사의 도이츠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회사 제바스티안 슐테 사장은 “우리 엔진은 해발 3000m의 광산에서 영하 20도∼영상 40도 환경에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군대가 필요로 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했다. 도이츠는 연간 20억유로(약 3조원) 이상의 매출 중 약 2%를 이전에는 거의 없던 방위산업 분야에서 올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의 화학생산업체 알츠켐도 비슷한 사업 구조 재편을 시도하는 중이다. 2022년까지 알츠켐은 농작물 수확량 향상에 사용되는 제초제의 원료인 니트로구아니딘을 농업 부문에 공급하는 것을 핵심 사업으로 두고 있었다. 니트로구아니딘은 폭발성이 강해 장거리 포탄 추진에 사용될 수도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포탄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라인메탈은 지난 3년 동안 155㎜ 탄약 생산량을 10배로 늘렸고, 알츠켐은 이런 수요를 겨냥해 화약 사업의 비중을 늘리기로 결정했다. 안드레아스 니더마이어 알츠켐 CEO는 “가까운 미래에 방위 분야가 알츠켐 매출의 10%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국방 지출 증가가 많은 중소기업에게 기회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중소기업 로비 단체인 BVMW의 한스 유르겐 볼츠 수석 경제학자는 “독일 군대가 필요로 하는 서비스와 제품을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기업이 계약을 따내려고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같은 변화는 방위산업에 대해 독일이 가졌던 부정적 인식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례적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무기를 공급했던 이력 때문에 독일 산업계에서 무기 제조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왔다. 잠수함 제조업체 티센크루프 마린 시스템의 임원을 지낸 경험이 있는 슐테 사장은 엔진 제조업체의 고객 기반을 무기 계약업체로 확대하려는 자신의 계획이 처음에는 동료들의 저항에 부딪혔다고 말했다. 그러나 독일이 지정학적 변화에 직면하고, 국방력 강화가 절실해지면서 무기 생산에 대한 오랜 저항감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임성균 기자 imsu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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