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환 씽크포비엘 대표

[정보통신신문=박남수기자]
‘인공지능(AI) 3대 강국 도약’을 향한 정부의 움직임이 뜨겁다. AI 분야를 위한 1조9000억원의 추가 예산안이 지난달 국회를 통과했고, 대선 직전 유력 후보는 100조 원의 예산투자와 GPU 5만 개 확보를 약속했다. 바야흐로 총력전 양상이다.
우리가 AI ‘세계 3등’을 위해 달리는 이유 중 하나는 이 분야 1등(미국)과 2등(중국) 간 경쟁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만큼 치열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최근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인하여, 무조건 더 많은 투자가 경쟁력이라는 기존 구도가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1등의 입지는 위태로워졌고 2등이 부각했으며, 우리에게도 3등으로의 약진 가능성이 보이게 됐다. 하지만 그게 우리가 무작정 달리면 3등으로 갈 수 있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먼저 지금의 구도가 가능해진 이유, AI 패러다임 변화의 핵심을 알고 거기에 우리를 최적화해야 한다.
AI 세계대전을 촉발한 패러다임 전환의 본질은 경제성과 효율화에 있다. 지난달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AiDD 2025’에서도 현 AI 기술의 키워드는 ‘더 크게’가 아니라 ‘더 가볍게’였다. 올 초 딥시크가 AI 업계에 패러다임 전환 화두를 던지게 된 것도, 핵심은 기존 대비 놀랍도록 저사양의 하드웨어를 활용해서 실질적인 성과를 얻어냈다는 점에 있었다. 딥시크가 단지 더 잘해서가 아니라, 훨씬 적은 자원으로 잘 해냈기 때문에 기존의 구도를 바꾼 것이다.
양적 투자를 극대화하여 기술성능을 높이기보다,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최적화된 성과 실현이 최신 AI 산업의 흐름이다. 이를테면 저비트 모델이다. MS와 중국 과학원이 공동 발표한 BitNet 모델은 가중치를 1.58비트로 줄여 메모리 소비를 약 10배 낮추었고, 이어 저비트에 최적화된 비GPU 가속기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 정도면 개인 휴대전화에서 대형언어모델이 구동되고, 이것이 지금의 AI 산업이다. 우리가 만드는 신기술은 수백 년 쌓아 올려 완벽해진 거대 피라미드가 아니라, 스마트폰만 켜도 손안에서 이용할 수 있는 무언가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AI 3대 강국’을 향한 움직임이 필자에게는 크게 고무적으로 다가오면서도 한편으로 염려스럽다. 그것이 여전히 다양한 사업 중에서도 ‘GPU 다량 확보’를 핵심 슬로건으로 제시하는 식으로, 하드웨어의 성능과 그를 위한 물량 투자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GPU 확보는 당연히 중요하지만, 거기에만 집중하면 또 다른 리스크가 생긴다. 이를테면 현재와 같은 기술 격변 상황에서는 목표치가 완수되었을 무렵 기술적으로 더는 고성능 GPU가 불필요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애당초 공공이 나서서 고성능 하드웨어를 다량 확보한다는 식의 물량전으로는 800조 예산을 쓰는 중국과 700조 예산을 쓰는 미국에 대적할 수가 없다.
당연히 AI 산업에 대한 공적 투자는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백 년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GPU 확보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당장 GPU가 없어서 실험조차 못 하는 스타트업을 혁신의 최전선에 세울 수 있어서다. 하지만 GPU의 단순 수량 같은 것이 정책의 최종 목표여서는 안 된다. 공적 지원의 핵심은 산업 생태계가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드는 데 있다. 중국은 2017년 ‘AI 굴기’를 선언한 후 500개 대학에 학과를 신설해 연 10만명을 길러냈고 그 결과 세계 AI 인력의 4분의 1이 중국인이라는 분석이 있다. 2019년부터는 ‘AI 스타트업 1만개 양성’을 목표로 스타트업이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도록 컴퓨트+현금 결합형 그랜트를 제공했다. AI 산업에서 중국이 미국의 아성을 위협하게 된 것은 중국 정부가 자국 산업 생태계 토양을 가꾸는 일에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토양이 갖춰지고 나면, 정부 지원 없이 민간투자로 딥시크가 만들어질 수 있다.
우리는 기술 격변과 AI 패러다임 전환기 속에서, 때마침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다. 기왕 정책 좌표를 다시 찍는 상황이라면, 조금 더 세밀하게 판을 짜면 좋겠다. 이를테면 기업 지원을 ‘안 쓰면 손해’ 식으로 불필요할 수도 있는 장비를 쥐어주는 방식이 아니라, 저사양 장비로도 더 높은 품질을 성취할 때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세팅할 수 있다. 또한 혁신에 도전하는 기업이 더 길게, 더 오래 살아남아 노하우를 쌓고 실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다년형 R&D 인건비나 운영비 지원을 제도화하는 일도 꼭 필요하다. 요컨대 공공도 이제는 더 영리해져야 한다. 타국의 물량과 외형을 뒤늦게 쫓는 식으로는 영원히 따라잡기 어려울 것이다.
어차피 물량과 규모로는 미국이나 중국에 대적할 길이 없다. 과거 역사를 봐도 제조업에서나 문화 산업에서나 우리는 절대 규모보다 효율성, 기민함, 최신 트렌드를 바라보는 영리함으로 승부했다. AI 산업에서 역시 그런 ‘우리다움’으로 대처해야 승산이 있다. 마침 물량보다 효율화를 중시하는 현재의 AI 패러다임 변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