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일본 도쿄 근무를 하면서 첫 해외 생활을 시작했던 2000년이 가끔 생각난다. 세상은 밀레니엄의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지만 일본은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도쿄의 밤거리는 여전히 화려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활력보다는 침체된 분위기가 엿보였다.
2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의 도쿄는 사뭇 다르다. 바로 편의점에서부터 달라진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에는 젊은이들이 정규직을 마다하고 편의점 아르바이트, 일명 ‘프리타’만 하려고 하는 것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 현재는 그 당시 쉽게 볼 수 없었던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창한 일본어로 손님을 응대하고 있다.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일본 정부의 최근 변화된 이민 정책과 맞물려 이곳 사회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단면이다. 도쿄의 스카이라인도 몰라보게 바뀌었다. 예전에는 낮은 잿빛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면 지금은 고층 건물들이 쑥쑥 솟아나 도심 곳곳을 점령하고 있다.
무엇보다 반가운 변화는 ‘한류’, 한국의 위상이다. 지금의 도쿄 번화가에는 한국 상품을 전문으로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고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한국의 신인 아이돌 그룹이 공연할 수 있는 전용 공연장들도 곳곳에 생겨났다. 한때 반한 감정이 극에 달했던 시기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넘어선 놀라운 변화다.
변화하는 시대와 같이 글로벌 시계(視界)는 예측 불가능한 드라마와 같다. 국제 정세의 불확실성, 글로벌 공급망의 변화, 그리고 보호무역주의 등으로 ‘혼자 힘으로’ 모든 파도를 막아내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형국이다. 이 속에서 한국과 일본 기업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새로운 ‘해시태그’가 될 기회를 찾고 있다. 양국은 반도체 소재부터 첨단 인공지능(AI)까지, 그리고 광물 확보에서 미래 에너지에 이르기까지 놀랍도록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예를 들어 가장 뜨거운 분야인 반도체부터 살펴보면 이러한 경향성이 뚜렷해진다. 일본은 ‘반도체 왕국’의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차세대 반도체 개발 프로젝트에 엄청난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소재·부품 강국이었다면 이제는 생산 역량까지 끌어올리며 자국의 반도체 공급망을 단단히 하려는 것이다. 대한민국도 이미 명실상부한 ‘반도체 강국’이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 최대 규모의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목표로 초대형 투자를 예고했다. 양국 모두 반도체를 단순한 산업을 넘어 경제 안보의 핵심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 분모가 명확하다.
이처럼 양국은 첨단산업 육성, 공급망 안정화, 탄소 중립 등의 중대한 목표 앞에서 마치 쌍둥이처럼 닮은 고민과 정책 방향을 공유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양국이 서로의 강점을 인정하고 약점을 보완하며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강력한 메시지다. 일본의 첨단 소재·부품 기술력과 한국의 AI·소프트웨어 기술력이 더해진다면 글로벌 공급망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최근의 양국 간 협력 사례는 이러한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KOTRA도 지난 60여 년간 일본 현지에서 쌓아온 무역·투자 네트워크와 경험을 바탕으로 한일 공급망 협력이 더욱 공고해질 수 있도록 ‘지원군’ 역할을 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