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 위해 목숨 건 외교관들

“외교관은 국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라고 외국에 파견된, 정직한 사람이다.” 17세기 초 영국의 외교관 헨리 워튼의 재치 있는 정의다. 외교관이 국익을 위해서 하는 거짓말은 용인된다는 뜻이다. 특히 약소국이 생존을 위해 강대국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면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고려는 거란·여진·몽고의 정복왕조 시대를 거쳤다. 새로운 정복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동아시아에 전쟁이 벌어졌고, 고려에도 그 여파가 고스란히 미쳐왔다. 고려·거란 전쟁, 고려·몽고 전쟁이 그것이다. 고려가 강대국을 상대하면서 꿋꿋하게 살아남은 것은 군사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외교를 잘해서였다. 과연 고려의 외교는 정직했을까? 고려의 외교관 3명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중국에 새 왕조 생길 때마다 전쟁
약소국 고려, 외교 잘해 살아남아
11·12·13세기 하공진·유응규·이장용
거짓말로 각각 거란·금·몽고 물리쳐
치열한 외교가 평화 지킨 원동력
하공진·유응규 후손에 훗날 관직
거란에 간과 심장을 내준 하공진

고려·거란 전쟁은 서희의 외교 담판과 강감찬의 귀주 대첩으로 유명하지만, 그들 말고도 꼭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있다. 1010년 거란의 2차 침략 때 협상을 벌여 거란군이 돌아가게 한 하공진(河拱辰·?~1011)이다. 그에 앞서 1004년에 거란은 송에 승리를 거두고 동아시아 패권을 차지했다. 그 뒤 고려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고려에서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자 강조 토벌을 명분으로 침략해왔다. 거란 황제가 직접 기병 20만, 보병 2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개경으로 향했다. 고려에서는 강조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전했지만 패배하고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거란군은 파죽지세로 몰려왔고, 국왕 현종은 어쩔 수 없이 개경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다. 겨우 금군 50명이 호위하는 위태로운 행차였다.
피란 행렬이 경기도 광주에 도착했을 때 거란 선봉 부대가 양주까지 다다랐다. 기병이 서너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국왕이 사로잡힐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하공진이 왕을 찾아왔다. 그는 거란과 협상할 것을 제안했다. 거란이 이미 강조를 죽였으니 전쟁의 명분은 사라졌으며 따라서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논리였다. 그리고는 자청해서 양주의 거란 군영으로 갔다. 그곳에서 하공진과 거란 장수의 대화가 다음과 같았다.

거란 장수가 “너희 국왕은 어디 있는가?” 하자 하공진이 “지금 강남으로 가셨는데, 어디 계신지는 모른다”라고 대답했다. “강남이 먼가, 가까운가?”라고 묻자 “강남은 너무 멀어 몇만 리인지 알 수가 없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추격하던 거란군이 돌아갔다. (『고려사』)
여기서 말하는 강남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몇만 리는 과장이고 거짓이었다. 그럼에도 이 거짓말이 지척에 와있던 거란군의 말머리를 돌림으로써 국왕을 구하고 나라를 구하는 묘수가 되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하공진은 거란 황제에게 가서 철수하면 국왕이 직접 거란에 가서 친조(親朝·황제를 알현함)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고려에서 친조 논의가 없던 것으로 보아 하공진의 임기응변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말을 믿고 거란군이 철수했고, 하공진은 협상에 성공했다고 보고했다. 하공진은 거란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의 최후는 이랬다.
하공진이 거란 황제에게 “저는 나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하나 살아서 대국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의롭게 여기고 절개를 바꿔 자기에게 충성하라고 설득했으나 하공진의 말투가 점점 더 강경하고 불손해지자 마침내 그를 죽이고 심장과 간을 꺼내 먹었다. (『고려사』)
금나라에서 단식 투쟁한 유응규

12세기 초에는 여진족이 금을 건국하고 거란을 멸망시킨 뒤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했다. 고려는 두 나라의 전쟁에서 철저히 중립을 지켰고, 금이 승리하자 사대의 대상을 재빨리 거란에서 금으로 변경했다. 그 덕분에 금과는 전쟁을 치르지 않고 12세기 100년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금과의 관계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1170년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의종을 폐위하고 동생 명종을 왕으로 세웠을 때 한 번의 위기가 있었다. 국왕 폐위는 전에 거란이 그랬던 것처럼 책봉국의 침략을 부를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고려에서는 의종이 병이 들어 동생에게 양위한 것이라고 꾸몄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때 금의 승인을 받기 위해 파견된 사람이 유응규(庾應圭·1131~1175)였다. 그는 평소 청렴하고 검소하기로 소문난 관리였다. 정직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러 외국에 파견된 것이다.
금 황제는 고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고려가 거짓으로 속이려 한다면서 고려를 토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유응규는 “비록 내가 끓는 가마솥에 던져지고 도끼에 찍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이 아니라고 강변했다. 그러면서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어 거짓이 아님을 세상이 알게 하겠다”며 농성에 들어갔다. 음식을 끊은 채 의관을 갖춰 입고 황궁을 향해 서서 황제의 대답을 기다렸다. 3일이 지나자 황제가 알게 되었고, 수차례 음식을 보냈으나 기어이 먹지 않았다. 5일이 지나 얼굴이 창백해지고 숨이 끊어질 듯하며 서 있을 힘이 없어 자꾸 쓰러질 정도가 되자 황제가 마지못해 양위를 승인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유응규는 단식을 멈추지 않았다. 약속을 문서로 해줄 것을 요구하며 이틀을 더 버텼고, 결국 7일간의 단식 투쟁 끝에 의종의 양위를 인정한다는 금 황제의 조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의 활약으로 자칫 금과 외교적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13세기에 고려는 몽고와 28년 동안 전쟁을 벌였다. 1260년에 강화를 맺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지만, 그 뒤로도 몽고의 무리한 요구와 압력으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몽고의 최대 관심사는 고려 국왕의 친조와 군대 징발이었다. 하지만 친조는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왕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으므로 반대가 심했다. 그때 나선 사람이 65세의 원로 재상 이장용(李藏用·1201~1272)이었다. 그는 친조를 하면 화친이 유지될 것이며, 하지 않으면 틈이 생길 것이라며 친조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만일 국왕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다면 내 처자식이 살육당하는 것도 감수하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역사 최초로 친조가 실행되고 몽고와 화친이 유지되었다.
몽고에서 병력 수를 숨긴 이장용
이장용은 국왕 원종을 수행해 몽고에 갔고, 그곳에서 군대 징발 요구에 부닥쳤다. 본래 몽고는 고려의 인구를 파악하려 했지만 고려는 자료 제출을 극력 거부했다. 인구가 밝혀지면 군사 동원뿐 아니라 각종 물자의 수탈에도 근거 자료로 이용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장용이 몽고에 갔을 때, 쿠빌라이 칸은 고려의 군사가 5만 명이란 사실을 알아내고 그 가운데 4만 명을 내놓을 것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5만 병력은 왕준이란 자의 제보에 따른 것이었다. 이장용은 즉각 부정했다. 원래대로라면 5만 명이 있어야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그 수가 채워져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왕준과 함께 고려에 가서 점검하고, 왕준의 말이 옳으면 내 목을 베고 내 말이 옳으면 왕준의 목을 벨 것”을 요구했다. 이 결기에 쿠빌라이 칸이 물러섰고, 징발 규모는 고려에 일임하기로 결정됐다. 그에 따라 1만 명을 동원했는데, 적지 않은 부담이었지만 몽고의 요구에 비하면 훨씬 줄어든 것이었다.
누구는 타국에서 심장과 간을 내놓고, 누구는 단식 농성을 하고, 어떤 원로 재상은 목숨을 담보로 거짓말을 했다. 누군들 이렇게 하고 싶었을까. 하지만 상대가 강대국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의 거짓말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허투루 한 것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하는 절박한 거짓말이었다. 이렇게 치열한 외교가 나라를 구하고 평화를 지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1298년, 하공진이 죽임을 당한 지 약 300년 뒤에, 그리고 유응규가 사망한 지 100여 년 뒤에 충선왕은 하공진과 유응규의 후손들에게 관직을 내렸다. 그때까지도 고려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 역시 고려의 장수 비결 중 하나였다. 역사가 뒷걸음을 치는지, 지금 세계에는 힘을 앞세워 다른 나라를 윽박지르고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 야만스러운 외교가 되살아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하공진·유응규·이장용 같은 외교관이 보고 싶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