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택배 상자를 타고···전쟁 속 우크라이나 Z세대의 ‘골판지 혁명’

2025-08-04

15~23세가 주축이 된 집회 문화

텔레그램으로 연락해 역할 분담

대중가요·문학작품에서 따온 창의적 구호

색깔에서 문장으로…진화한 투쟁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국회의사당과 마주한 키이우 마린스키 공원. 의회(라다)가 국가반부패국(NABU)과 반부패특별검사실(SAPO)의 독립성을 복원하는 법안을 찬성 331표, 반대 0표로 통과시켰다는 소식이 생중계로 전해지자 공원에서 모여있던 시민들이 골판지 푯말을 흔들며 환호했다.

이는 지난달 22일 의회가 두 기관의 독립성을 제약하는 논란의 법안을 통과시키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곧바로 서명한 이후 9일간 반대 집회를 이어온 시민들이 거둔 승리였다. 러시아의 드론·미사일 공격 속에서도 시민들은 키이우 뿐 아니라 리비우, 드니프로 등 주요 도시에서 매일같이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씩 모였다. 우체국 박스와 택배 상자를 잘라 만든 푯말을 들고 나선 이들의 움직임은 BBC와 르몽드 등 주요 외신이 ‘골판지 혁명’이라 명명할 만큼 상징적이고 창의적이었다.

르몽드는 ‘골판지 혁명’이 본격화된 시점을 지난달 23일 두 번째 시위부터라고 봤다. 이날 키이우 이반 프랑코 극장 앞에는 경찰 추산 약 9000명의 시민이 모였고 참가자들은 우체국과 택배회사에서 구한 종이박스를 잘라 푯말을 만들었다. 일부는 피자 포장 박스를 들고 나왔다.

이 집회의 중심엔 전쟁 징집과 공습을 피해 해외로 떠났다고 여겨졌던 우크라이나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 출생)가 있었다. 첫 시위를 촉구한 인물도 2023년 입대한 참전용사 출신의 청년이었다.

기성세대와 야당 정치인들도 집회에 합류했지만 ‘골판지 혁명’이라는 새로운 집회 문화의 흐름은 청년들이 주도했다. 참가자들은 텔레그램을 통해 펜과 골판지, 생수 담당자, 경찰·의료진과 소통할 연락 담당자 등을 정해 역할을 분담했다.

이들은 정당의 깃발이나 정치인의 구호 없이 각자 직접 만든 푯말을 들어 자발성과 정치적 독립성을 강조했다. “내 동생은 이런 미래를 위해 전사하지 않았다”, “부패는 침묵을 좋아한다, 침묵하지 말자”는 푯말 문구는 감정적 호소력과 함께 시민들의 각성을 이끌었다.

특히 푯말의 내용은 유머와 창의성, 그리고 문학과 음악의 인용으로 가득했다는 점이 이전과 달랐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따온 “모든 동물은 평등하지만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 우크라이나 현대 시인 세르히이 즈하다니의 “왜 나에게 반하는 시스템이 필요하지?”, 1960년대 소련의 억압에 저항한 시인 바실 스투스의 “독재에 반대하는 자여, 일어서라!”, 인기 밴드 쿠르간 앤 아그레갓의 “더 이상 똥은 못 참겠어” 등 다양한 인용이 등장했다. 골판지에 형형색색의 전구를 붙여 꾸미기도 하고 인기 캐릭터 라부부 인형을 그려 넣기도 했다. 폴리티코 유럽판은 15세에서 23세 사이의 젊은 층이 만든 이 창의적인 푯말들이 시위 현장 최전선에서 사기를 북돋웠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는 1990년 화강암 혁명, 2004년 오렌지 혁명, 2013~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이어지는 견고한 민주주의 경험이 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친러 정책에 반대하며 벌어진 유로마이단 혁명 결과로 독립적 반부패 기관인 NABU와 SAPO가 설립됐다.

마린스키 공원 집회에 참석한 엘리자베스는 키이우포스트에 “나의 부모님, 아니 우리의 부모님들은 혁명을 위해 마이단(광장)에 계셨고 그분들이 거기 계셨던 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국립문화예술박물관단지 책임자인 올레시아 오스트롭스카-류타는 골판지 혁명에 대해 “정말 창의적이고 지적인 집회였다”면서 “2004년 오렌지 혁명도 극적인 요소가 강했지만, 그때는 인용구가 아니라 색깔이었다”고 했다. 오렌지 혁명 당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들은 주황색 깃발과 스카프를 두르고 나왔다.

골판지 푯말은 의회로도 옮겨졌다. 31일 표결에 참석한 의원들은 “우리는 국민과 함께한다”는 문구 등을 적은 골판지 푯말을 들어 시위대에 연대의 뜻을 전했다.

BBC는 “러시아의 치명적인 드론과 미사일 공격 위협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해 맞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준 집회”였다며 우크라이나 사회가 전시 상황 속에서도 민주주의 가치를 지켜내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시위에 참여했던 앤젤리나 오니키이추크는 르몽드에 “이번 사태로 우리가 진짜 민주주의 국가라는 걸 증명한 셈”이라며 “우리는 절대 러시아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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