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의 압존법에 주목한다

2025-06-18

높임말은 우리말의 대표 매력이다. 윗사람을 공경하는 마음, 아랫사람의 겸손한 태도가 일상의 대화에 녹아 있다. 서술어와 조사가 변화무쌍하게 바뀌며 청자와 화자 사이에 다양한 케미를 조성한다. 한국 특유의 경어법(敬語法)에서 제일 어려운 문법이 ‘압존법(壓尊法)’이다. 높여야 할 대상인데 듣는 사람이 더 높을 때 그 공대를 줄이는 어법이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아직 안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할아버지 앞에서 아버지에 대한 존대를 누르는(壓·압) 것이다.

윗사람 존대 누르는 높임법처럼

참모는 대통령 낮춰 국민 높여야

압존이 큰머슴 성공 만드는 비결

압존법은 주로 가정 안, 사제(師弟)간에 쓰인다. 사회적 관계에선 전통 예절은 아니라는 게 국립국어원의 입장이다. 그러나 직장에서도 아예 무시되지는 않는다. 국립국어원은 윗사람(과장)에 대해 그보다 윗사람(사장)에게 말할 때 “과장님께서 이 일을 하셨습니다”는 곤란해도 “과장님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 정도는 쓸 수 있다는 용례를 제시한다. 가정에서처럼 ‘사장님, 과장이 이 일을 했습니다’까지 존대를 누를 필요는 없다.

압존법은 완화되는 추세다. 용법이 헷갈리기도 하거니와 조직 내 갈등을 부르는 폐해가 지적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2016년 국방부는 경직된 병영 문화를 바꾼다면서 ‘압존법 폐지’를 일선 부대에 지침으로 내려보냈다. 서열을 숙지하지 못한 일병이 병장 앞에서 상병을 존대했다가 얼차려를 당하는 등의 괴롭힘에 악용된 것이다.

우여곡절에도 압존법은 명맥을 잇고 있다. 상대방(청자)의 입장에서 구사된다는 특성이 한몫한 듯하다. 듣는 이에게 더 존중받는 느낌을 주는 효능을 일부러 포기할 이유는 없다. 각박한 조직 생활에선 상사를 예우하려고 압존법을 애써 챙기는 부하 직원의 배려가 기특해 보이기도 한다. 최근의 압존법이 엄격한 적용을 탈피하는 경향을 보이는 게 윗사람이 다시 아랫사람을 배려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두 사람 모두 존대해야 하는 아랫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쪽으로 말이 변해 가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인류애가 살아 숨 쉬는 문법 아닌가.

이재명 정부의 출범을 보면서 압존법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대통령 취임 뒤 보름간 대통령실 발표에는 대체로 압존법이 사용되고 있다. 강유정 대변인의 브리핑은 주로 주어가 ‘이재명 대통령은~’이고 서술어는 ‘~했습니다’인 평어체다. 다른 참모들이 간혹 ‘대통령님께서~ 첫 해외 방문길에 오르십니다’ 등의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일사불란하게 압존법을 사용하기로 정한 것 같지는 않다.

꼰대 고참처럼 대통령실에 압존법 준수를 촉구하는 건 아니다. 대통령에 대한 존대가 과했을 때 생기는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불편한 케미를 잊지 말아 달라는 얘기다. 이재명 정부에선 더 민감한 문제다. 지금의 국민이 누군가. 민주주의를 우습게 안 대통령을 파면하고 새 대통령에게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한 명실상부한 이 나라의 주인이다. 이재명 정부가 국민주권정부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압존법을 지켜보는 긴장감은 더 크다. 대통령을 국민 위에 두는 참모들의 언행은 미덕이 될 수 없다. 그런 개념과 디테일이 ‘K민주주의’의 기반이다. “정치인은 주권자의 대리인인 일꾼, 머슴이다”고 외친 이 대통령의 소신과도 연결된다. G7 회의에 1박3일 출장을 다녀오며 기내 기자간담회를 연 것도 국민과 실용을 앞세운 이 대통령의 메시지다.

비교적 좋은 평가로 출발하고 있지만, 새 정부의 첫발을 바라보는 국민은 아슬아슬한 심정이다. 문재인 정부 때 청와대 참모들의 방에 걸렸던 ‘춘풍추상(春風秋霜)’이 결국 ‘내로남불’로 드러나는 걸 목도했다. 지금은 당연한 압존법이 언제든 용비어천가로 바뀔지 모른다.

이재명 정부에선 충성 경쟁 대신 압존 경쟁이 펼쳐지길 바란다. 그래야 “임기 마칠 때 지지율이 더 높기를 기대한다”는 이 대통령의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참모들의 압존법이 ‘큰머슴’의 성공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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